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天眞山메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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天眞山 메아리
  1. 天眞山 메아리


역사학만으로는 놓치기 쉬운 교회사 3
<역사학만으로는 놓치기 쉬운 교회사 3>
-김학렬 약망 신부-
 
 
3. 권철신
 
I. 감호
 
1) 양평에서 권철신가문이 살던 감호를 확인하였다.(사진/2008105일 양근성지 하류).
 
* 하성래의 윤유일전 p. 31 -감호수창첩에 권철신의 한시 11수가 전한다. 감호에 낙향한 증조 할아버지 흠은 함경도 관찰사였었다.
 
2) 갈산 / 보감에 연재된 대한성교사기에 양근 고을 葛山(지금도 읍사무소 옆에 있다)
 
=과거(1784. 9/cf. 달레상 311) 이벽(李檗)이 처음으로 서교(西敎)를 전파할 때.
 
=다블뤼의 비망기, 15-17/ 갑진17849월에 이벽은 말을 타고 양근 고을의 감산에 있는 집으로 갔다(달레 상 311). =원본의 글자가 kar의 오기는 아닌지 확인할 필요가 있다. 비슷한 오기를 최양업 신부의 편지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데, 발신지로 나오는 소리웃(Soriut)은 현재도 지명이 남아있는 이천 송()()()의 순 한글식 이름인 소리울(Soriul)이다.
 
3) 1795년에, 주문모 신부는 박해를 피해 최인길의 집을 떠나 창동. 석정동, 사축서동으로 피하였고, 양근의 권상문(=1780년에 조부 맹용의 사후부터 권철신의 계자가 되어 함께 살았을 것.)의 집에서도 3일을 머물렀다.(추안, 순조13.15. 주문모공초; 달레 상 390 -양근직()()()삼일).
 
4) 양근 한강포/ = 1807 정묘보
 
-사학징의에서도, 권상문이 양근 한강포에 살면서 과거공부를 한다고 하였다.(달레 중 503에 있는 한감개/ 한강개는 족보 1807년 정묘보와 사학징의 p. 152에 나오는 한강포를 잘못 기록했을 가능성이 있다.).
 
<김학렬의 견해 = 권철신 형제들이 살던 감호는 지금의 양평 읍사무소(=후손들의 증언과 일치)가 있는 곳이지 한감개나 대감말이 아니다. 추안 신유 218일에 나오는 내용, ‘供曰 曾居村中 故知之矣일찍이 같은 마을에서 살았으므로 알고 있습니다.’로 번역하는 것은 오역으로서, ‘일찍이 시골에 살 때부터 알고 있었습니다로 번역해야 한다.>. 사학징의 p. 283에서 남필용의 문초기록 속에, ‘의신어신해년분 매부권철신처 차책송습지시 기()()()윤유오(=인근에 윤유오가 거함)’ 이라 하였다. 결론적으로, 권철신의 생장향에 관하여, 정약용이 기술한 감호를 보감에서도 확인하고 있고, 후손들이 증언하는 구체적인 지점으로, 양평 읍사무소 자리를 지목하고 있다. (김학렬이 그 의미를 발견한 감호암에 대한 기사 참조.).
 
II. 권철신 묘지명
 
1) 정약용의 권철신 묘지명/ ‘公諱哲身字旣明自號曰鹿菴名其所居曰鑑湖安東之權也는 바르게 해석되어야 한다. 시복자료집 제1p. 217에서 인용된, 고전번역원의 재호는 감호라는 번역은 다음과 같이 시정되어야 한다.
 
= 공의 휘(족보에 나오는 이름)는 철신, 자는 기명, 스스로 지은 호는 가로되 녹암(남인계의 호로서 암자 돌림<순암, 직암, 광암, 사암, 손암> 으로, 자이다,), 그 유명한 거처는 가로되() 감호라 한다. 집안은 안동 권씨다.
 
 
III. 권철신의 활동.
 
1) 순암선생문집 제6, (), 권기명에게 답함, 1784(내용으로 보아 9월 이후)
 
지난번 공의 서신이 다른 때와는 딴판이기에 그래서 내가 불가 냄새가 풍긴다고 했던 것일세. 문의(文義)에 얽히는 것은 유학(儒學)을 하려면 면할 수 없는 과정인데, 공은 그것을 왜 자신의 큰 죄라고 여기는가? 실지 소득이 없는 것이야말로 자기의 잘못이니, 그것이 병임을 알았으면 곧 약을 쓰는 것이 우리들 법문(法門) 아니던가. 연구 잘하고 분석 잘하는 공의 그 재주로 명선(明善)과 성신(誠身) 양 쪽에 모두 주력하는 공부에 머리를 돌리지 않고, 어찌하여 입을 다물고 자신의 수양이나 하여 큰 악에 빠지지 말아야겠다는 말을 하는 것인가? 지난번 영남 유생들에게 들으니, 또 사흥(士興)이 와서 칠극(七克)을 빌려 갔다고 하기에 마음 속으로 의아하게 여겨, “칠극은 사물(四勿)에 대한 주석이나 다름없는 것이니, 비록 뼈를 찌르는 듯한 절실한 내용이 더러 있기는 하지만 이 책에 무슨 취할 점이 있겠는가.” 했더니, 그 후 들리는 말에, “양학(洋學)이 크게 번져 아무 아무가 주동자이고, 아무 아무는 그 다음이고 그 밖에도 따라서 동화되어 간 사람들이 얼마나 되는지 모른다.”고 하기에, 너무나 놀란 적이 있지만 기왕 남의 입에 낭자하게 올랐다면 서로 좋아하는 사이에 숨기고 감출 것이 뭐가 있겠는가.
 
()()()()은 그 길이 우리 유도(儒道)와는 다르기 때문에, 그 폐단이 결과적으로 허무(虛無)적멸(寂滅)무부(無父)무군(無君)이 되어, 결국 이단(異端)이 된 것 아닌가. 지금 이른바 천주학(天主學)이라는 것은 바로 이름만 바꾼 불씨(佛氏)인 것으로 나도 대략 본 일이 있는데, 그 대의가 천당지옥이라는 것이 같고, 마귀라는 것이 같고, 재소(齋素)도 같고, 군신부자부부의 인륜이 없는 것도 같고, 십계(十誡)와 칠계(七戒)도 다를 것이 없고, 사행(四行)과 사대(四大)도 같네. 그 밖에도 이루 다 들 수가 없지만 대체적으로 그들이 주장하는 것은 구세(救世)이지. 구마라집(鳩摩羅什)과 달마존자(達摩尊者)가 다 구세를 내세워 큰 바다를 건너 중국까지 와서 자기들 교화를 폈듯이 이마두(利瑪竇) 무리들도 역시 그러한 자들에 불과하다네. 옛 사람 말에 의하면, 석씨(釋氏)는 자기 스스로 생사(生死)의 경지를 초탈하기 위하여 그랬다고 하는데, 지금 천주학을 하는 자들도 밤낮으로 기도하면서 지옥으로 떨어지는 것을 면하게 해달라고 하는 것이 모두가 불학(佛學)인 것일세.
 
제군들이 평소에 그렇게도 불교를 배척했으면서 지금 천주학에는 꼼짝 못하는 것을 보면 틀림없이 사람을 감동시킬 만한 별다른 문자가 있어서 그럴 터이지. 이런 까닭에 전번 서신에서 청했던 것은 까닭이 있어서였는데, 지금 들으니 덕조(德操)가 얼마간의 서책을 가지고 갔다는데 이곳을 지나면서도 나를 찾아 보지 않고 그냥 지나쳐 버린 그 까닭을 알 수 없군.(=9) 아마 공부의 길이 달라 서로 얘기할 것이 없기 때문이었을까? 남을 선으로 인도한다는 천주의 뜻은 틀림없이 그렇지 않을 것일세.
 
그러나 명덕(明德)을 천하에 밝히려는 성인의 구세 뜻은 그 얼마나 거룩한 것인가. 그 명교(名敎)의 안락한 곳을 굳이 버려두고 천당을 찾는 것인지? 이른바, 중국의 법도로 오랑캐를 변화시킨다는 말은 들었어도 오랑캐에 의해 변화된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고 한 것이 바로 이런 경우가 아니겠는가. 내 뜻을 이해하고 다시 답을 주기 바라네.
 
2) 벽위편 김시준역, 97/ 권철신과 이사흥(기양)에게 보내는 편지 갑진년.
 
=안정복, 부부고 권 10, 권철신과 이기양에게 보낸편지 1784. 12월 서한에,(cf. 자료집1)
 
요즈음에 庭藻(이가환의 자), 天全(정약전의 자), 子述(이승훈의 자), 덕조 등이 서로 긴밀히 연락하고, 새로운 학문(新學 즉 천주교)의 학설을 익힌다는 말이 파다하게 나돌고 있네, 또 지난번에 들의 문의(당시 이기양이 문의 현령)에서 온 서한 중에 그 집안의 두 소년(=이총억과 이방억)이 모두 이 공부를 한다고 칭찬하여 마지 않았다고 하는데, 이 어찌 크게 놀랄 일이 아니겠는가. 이들은 모두 공의 절친한 친구와 문도들이니, 공이 금하고 막을 일이 있었을 터인데, 어찌 이같이 날뛰는 데 이르게 하였으며, 금하고 막지 않을 뿐만 아니라 밀어주고 부축한다 하니 어찌된 일인가?’.
 
3) 인천에서 권일신이 권철신에게 쓴 편지를 읽고(추안1801 1차 심문중/주재자 흠숭 + 삼혼설+ 4근본 원소... 그래서 이몸도 그 책들을 보았습니다.) 신앙을 받아들였다. 178412월 이전에(cf.안순암의 2편지) 암브로시오로 세례받았다. (달레상311).
 
4) 안순암의 갑진178412/ 2편지, 권기명에 답함 /cf. 벽위편, 안순암의 을사일기 (), ‘그런데 지금 또 듣자하니, 공이 서양의 천주학에 있어 경망하고 철없는 젊은 것들의 앞잡이가 되고 있다는데, 이렇게 갑자기 이학(異學)으로 가버리다니 과연 어찌해서 그러한 것인가?’.
 
5) 달레 상 440/그 이름의 권위로 많은 외교인이 복음으로 끌려왔다. 달레 상 489/여주의 노론 대가인 김건순이 18세에 양부가 세상을 떠났을 때, 권철신 암브로시오에게 문의하고(권철신이 지은 우제의 글 참조?) 송조 때의 의식으로 장례를 치루고 긴 변호문을 썼는데, 이가환도 이에 감탄하였다.(=백서 56) ; 달레 상 491 김건순은 밤에 권철신을 찾아가 만나 신앙을 갖게 되었고, 이후 1797. 8월에 정광수가 전달한 주문모 신부의 편지를 받고 상경하여, 올바른 구원의 길로 나가 여주의 이중배 원경도 이희영(=이가환과 쌍 매부지간인 정철조의 제자 화가) 등을 개종시켰다. 사학징의에, 김건순은 국청정법죄인으로 처형되었다.(백서 60). 그러므로 여주지역의 신앙은 권철신에게서 신앙을 알게된 김건순을 중심으로 성장하게 된다.
 
6) 충주지방의 천주교 전파도 권철신의 인척관계로 시작된다. (cf. 서종태, 양평군지 497) 권철신의 조카인 권상익(권득신의 )을 사위로 맞은 충주의 이기연은 권일신으로부터 교리를 배우고 입교하였다. 이기연은 가족과 친지들에게 신앙을 전하여, 아들 이중덕, 며느리 권아기련, 조카 이종덕, 종질 이문덕, 종손 이관기 등과 집안의 비녀까지 교리를 배워 천주교를 믿었다. 권철신의 사위인 이재섭(=이문우성인의 할아버지로서,cf.벽위편 김시준역 341; 남보498=연안이씨 이용섭(cf. 안정복과 교류한 이인섭 ‘=정약용의 서매와 결혼한 이인섭의 서자 이중식과는 12/남보500)도 충주지역에서 신앙생활을 하였고, 권철신의 처남인 남필용(남보 1405)도 충주에 살면서 1791년에 입교하였으며, 남필용의 아들 남제(=?남이관 성인?)도 부친에게 교리를 배워 천주교를 믿었다(cf. 사학징의 62, 169-170, 178, 180-184, 274-275, 282-286).
 
7) 내포지방 여사울의 이존창은 원래 이기양 밑에서 공부하다가, 이총억을 따라 권철신의 문하로 옮겨 학문을 닦던 중, 1784년 겨울 무렵에 권일신에게 교리를 배우고 세례를 받았다. 그의 발길은 당진과 보령의 염전지역에서 삽교천 인근의 덕산, 그리고 공주와 청양으로 이어졌다. 김대건 신부의 집안과 최양업 신부의 집안도 이존창의 가르침으로 신자가 되었다. 후에 서울로 이주하여 지도층이 된 홍필주와 황심도 역시 이존창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 하성래, 윤유일전 p. 28/ 이존창이 177613세의 이총억을 따라서 권철신의 문하에 들어왔다.
 
8) 전라도 지방의 경우도 전주와 진산을 중심으로 복음이 전파되었는데, 이는 양근의 권철신의 집을 매개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전주의 유항검은 1784년에 권철신을 찾아갔다가, 권일신의 가르침을 받고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 (달레 상 314; 징의 228) 진산의 윤지충(=정약용의 이종 4)도 권철신의 제자인 정약전의 영향으로 1784년에 입교하여, 1787년에 정약전을 대부로 이승훈에게 영세하였다. 이어서 윤지충의 영향으로 무안. 무장, 고산 지역의 신앙공동체도 생겨나게 되었다.(달레 상 531).
 
9) 이상과 같이 양근에 사는 권철신, 권일신 형제가 이벽의 전교로 신앙을 가지게 되자, 이어서 충청도의 내포지역과 충추지역, 그리고 전라도의 전주와 진산 등지로 널리 전파되어 갔다. 그리하여 정조 191795에는 금정, 예산, 충주 등 호서지방에 천주교인들이 많았으므로, 이가환. 정약용. 이승훈을 보내어 천주교를 탄압하고자 할 정도였다.(달레 상 396 ; 정조실록 191795. 725).
 
10) 강완숙의 진술(cf. 사학징의 p.95)에서, ‘제가(=주문모신부의 편지) 항시 편지를 주고받은 곳은 정약종, 정약용, 오석충, 권철신, 문영인(폐궁 나인), 권철신의 손아래 누이(=이윤하의 아들들) 등의 집입니다. 편지도 압수되었으니, 만번 죽어도 아쉽지 않습니다.’ 하였다.
 
 
IV. 권철신의 사형을 결정하게 된 근거.
 
1). 추안 및 국안 1801. 2. 19. 죄인 권철신 형문1차 신장 30(=한계치+ 66).
 
-“윤유일의 흉악하고 비밀스러운 일을 익히 참여해 들은 것은 실정을 알고도 고하지 않은 죄라는 것을 그 역시 자복하였으니, 청컨대 옥사가 끝나기를 기다려 형률에 따라 처단하소서.” 하였다.
 
2). 다산시문집 15, 권철신 묘지명에서,
 
을묘년에 죽은 윤유일(尹有一)이 본시 그의 제자였으니, 그 비밀스러운 속사정을 알지 못한 바가 없었을 것이다.” 하니, 드디어 이 자의 말에 의하여 공의 사형(死刑)을 결정하였다. 그때 마침 고문의 상처로 인해 공이 죽자 드디어 기시(棄市)할 것을 논의하였으니, 그날이 225일이었다. (김학렬의 견해 =이가환도 윤유일이 북경에 갈 때 은자 500냥을 보태며(징의 p. 232), 적극적으로 참여한 것이 확인되어, 권철신과 함께 같은 순교를 당한 것이다. 그 순교의 방법은 1795628일에 윤유일이 매 맞아 죽은 장폐와 똑같은 형벌이었다.)
 
< 김학렬의 견해 = 권철신은 공초에서 제사 문제(=[주교연기]에 나오는 補儒闢佛 보유벽불등을 읽으며, 제사문제는 변화가 가능한 규정이라는 것을 인지하였을 것.)를 두고 벌을 피하기 위해 법적인 논란을 벌이고 있으나, 사형의 결정적 근거는 윤유일을 제자로 받아들여 학문과 신앙까지 전해주었고 윤유일의 북경행을 도왔다는 죄목 때문이었으므로, 이가환과 함께 윤유일처럼 장폐로 순교하였다. 권철신의 죽음은 정묘보 1807년에 나오는 대로, ‘이사학장폐가 논란의 여지가 없는 진실이며, 매를 맞아 物故되었다. 이는 신앙에 대한 증오로( In odio fidei) 인한 죽음이 되어 순교가 되는 것이다.> .
 
p. s. 사진과 각주 등에 대하여는 첨부 파일을 참고 하시기 바랍니다.
 
2018. 1. 13. 김학렬 약망 신부.

첨부파일1 : 201811410512353266.hwp
Writer : 김학렬 신부   Date. 2018-01-14 1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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