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天眞山메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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天眞山 메아리
  1. 天眞山 메아리


역사학만으로는 놓치기 쉬운 교회사 4
<역사학만으로는 놓치기 쉬운 교회사 4>
-김학렬 약망 신부-
 
 4. 이승훈과 정약용의 신앙.

1). 이승훈의 가문은 평창 이씨 가문으로, 많은 사람이 정계에 진출해 있었다.

   이승훈(1756-1801)은 부친 이동욱(1739-1794)과 모친 여흥 이씨(=이가환의 누이)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이동욱도 관직이 영월 도호부사 , 의주부윤(2)에 이르렀다. 이승훈의 집은 서울 남문 밖의 염초(=화약고)천 다리에 있어, 지금의 죽림동 지역 반석방에서 태어나 蔓草川 부근에 거주하였기에, 호를 蔓川이라 하였다. 마재의 정씨 가문에 장가를 들어 세 아들택규, 국규, 신규를 낳았다. 178024세에 진사에 급제한 그는, 외삼촌 이가환(1742-1801)과 성호 이익의 영향을 받으며, 권철신의 문하에서 이벽, 정약용, 정약전, 이윤하(?-1793), 이기경(1756-1819) 등과 학문적 교류를 통해 성장하였다.(cf. 정약용의 선중씨 묘지명). 이승훈이 강학에 참석한 근거는 다음과 같다.

2). 이승훈은 천진암강학에 참석하였다.

    정약전 묘지명에, 與李潤夏李承薰金源星등과 돌같이 굳은 친분을 맺고 -定爲石交, -정약전이 녹암(鹿菴) 권철신(權哲身)의 문하(門下)로 들어가 가르침을 받았다. 그때 그곳 강학회자는 김원성권상학(權相學)이총억(李寵億, 이존창도 177613세의 이총억을 따라서 권철신의 문하에) 등 몇몇 사람이었다. 이때 이승훈도 자신을 가다듬고 노력하였으므로 -當此時 李承薰亦淬礪自強, 함께 서교(西郊)로 나아가 향사례(鄕射禮)를 행하니, 모인 사람이 백여 명이었다. 소문을 듣고 찾아오는 사람 또한 많았다.

<김학렬의 견해 =이같이 강학 전후의 문장에 연결되어 이승훈의 이름과 활동이 나오므로, 이승훈도 강학에 참여했음을 알 수 있다.(cf. 주재용, 옹위 54). 그러므로 이승훈도 천진암강학에 참석하였고, 이 천진암강학에서 이들은 엎드려 기도하고 주일을 지키는 등, 기도공동체가 형성됨으로써 한국천주교회가 창립되었다.>

 3). 이승훈의 북당 세례

동지사 서장관인 아버지를 수행한 자제군관으로 5개월의 여행 중에, 북경에 머무는 40 여일 동안에 세례까지 받았다는 것은, 이승훈이 이미 잘 준비되어 갔음을 의미한다.

=하성래, 윤유일전 p. 27/ 1790년에 윤유일을 잘 준비시켜 (裝送之時 + 裝送之事 =추국일기 1801.2.18. 권철신공초).

=이벽이 1783년에 이승훈을 북경에 파견한 것도 裝送이승훈 (cf. 순조실록 신유1027일 이만수의 토사주문) 이라하였다.

4) 하느님의 섭리는 이승훈의 북경행을 두 배의 확률로 아버지를 동행하도록 안배하셨다.

일성록에 의하면, 1783. 10. 15.에 사은사 홍낙성, 윤사국, 이노춘이 먼저 하직 인사를 하였고, 10일 후인 1783. 10. 24.에는 동지사 황인점, 유의양, 이동욱이 하직 인사를 하고 북경으로 떠났다. 사은사는 1213일에 북경(北京)에 이르렀고, 동지사는 21일에 북경(北京)에 도착하였다. 귀국은 1784.3.4.에 사은사 홍낙성과 이노춘이 입시하여 입국보고를 하였고, 1784. 3. 24.에 황인점과 유의양이 입시하여 보고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승훈은 아버지를 따라서 1783. 10. 24.에 출발하여 1784. 3. 23.에 귀국할 때까지 만 5개월의 여행을 하였다.

1>.정조실록 1784, -02-17/ 동지 정사 황인점·부사 유의양이 장계하다 (=돌아오는 중간에 북경에서의 활동을 날짜별로 보고하고 있으며, 같은 날짜에 사은 정사(謝恩正使) 홍낙성(洪樂性), 부사(副使) 윤사국(尹師國)이 장계(狀啓)하고 있다.)

올해 정월 초15()에 신들이(=동지 정사 황인점, 부사 유의양) 서장관 이동욱 및 사은 정사신(謝恩正使臣 =정사 홍낙성, 부사 윤사국, 서장관 이노춘)과 함께 두 사행의 정관(正官) 49()을 거느리고 대궐에 가서 태화전(太和殿) 뜰 서반(西班)에 들어가 저들의 동반·서반 및 유구국의 사신과 마찬가지로 행례(行禮)하였습니다.’

2>. 수원교구 성지위원회 신부들이 북경의 북당 서십고성당을 순례하였는데(2013.3.), 사순절이어서 청색제의(cf. [미살제의]와 명례방 집회시 청건 참조)를 입고 미사를 드렸다.

김학렬의 강론내용= 이승훈 성현이 북당에서 (물로 씻는)세례를 받은 것은 유효하나, 세례집전 자격이 없는 신부가 세례를 주었기 때문에 부당한(validum sed illicitum) 것이었다.

왜냐하면 예수회의 적응주의를 두고 중국에서는 이미 제례논쟁이 일어났고, 영화 Mission 과 같은 배경에서 권력층의 미움을 샀던 예수회는 1773년에 해산되었다.(그러나 나폴레옹의 실각이후 예수회는 1814년에 복원되어 현재에 이른다.) 그런데 이미 10년 전에 해산된 예수회의 그라몽(양동재) 신부가 북당에 식객으로 머물러 있으면서, 주변 신부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이승훈에게 세례를 주었다. 따라서 이승훈은 제사금령도 알지 못한 채, 세례를 받고 돌아왔다. 제사 금령을 중국에서 본격적으로 시행한 사람은 뒤늦게 1785년에 북경 교구장으로 부임해 온 구베아 주교였다. 그는 포르투갈 출신의 프란치스코 회원으로서 수학자였고, 아담 살 신부 이후 맡아오던 흠천감정으로 일하였다. 그러므로 구베아 주교는 이승훈에 관하여 이야기 할 때마다 수학에 관한 사항을 강조하여 말하고 있다.

3>. 잘 준비된 이승훈의 북당 세례

이승훈은 미리 준비되어 북경에 파견되어 갔고, 결국 세례를 받고 돌아왔다./ 아무리 주변 신부들이 반대하였다고는 하나, 40여일 만에 필담으로 교리를 배워 영세하였다는 것은, 이벽이 잘 준비시켜 꾸며서 보낸( =裝送/ 이벽이 몰래 읽고있던 성서인 [천주강생언행기략][주교연기] 등을 읽으며 세례준비를 하게 하였을 것.) 사실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준비된 북경행이었다는 근거문헌은 황사영의 백서 44행이다. = 布衣李檗大奇之 -承薰 李檗密托曰 北京有天主堂 堂中有西士傳敎者 -求信經一部 幷請領洗 -必勿空還. ‘이승훈은 벼슬하지 않는 선비인 이벽이 아주 기특히 여기고 있어, 이벽이 이승훈에게 은밀히 부탁하였습니다. 북경에 가면 천주당이 있고, 성당에는 서양 전교자가 있으니, 기도서를 구해오고 더불어 영세를 청하여 받고, - 빈손으로 돌아오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4>. 김시준역 벽위편 p.153=신해진산의 변중, 24거상중의 신 이기경의 상소(1791.11.13.)

=1783계묘년 겨울에 승훈이 중국에 들어갈 때, (이기경)이 또한 전별 차 나아갔는데, 승훈이 말하기를, ‘내가 서양서적을 구입하려고 하는데 재력이 부족하니, 혹 서로 도울 길이 있겠는가?’. 신이 대답하기를 내가 무슨 재력이 있겠는가?’ 하고 돌아와 - ‘하필이면 서양책인가 하였습니다.’

5>. 이만수의 토사주문 (1801. 10. 27 순조실록)

=정약종이 공초(供招)하기를, ‘맨 처음에 이벽(李蘖)이 서양학(西洋學)이 있다는 것을 듣고는 이승훈(李承熏)이 그 아비 이동욱(李東郁)의 공사(貢使) 행차에 따라가도록 행장(行裝)을 꾸려 보내어 (추국일기 1801.2.18 권철신 공초에서도, 윤유일을 以日身之門徒 裝送之時-裝送之事 하며 치장하여 보냈다고 함.) 양인(洋人)이 거처하는 천주당(天主堂)에 들어가 양인과 더불어 친교를 맺고 양서(洋書)를 구입하여 돌아왔는데, - 이승훈이 구입해 온 사서(邪書)를 언문(諺文)으로 번역하여 널리 전파하였으니, 이가환이 실제 주관하였습니다. -若鍾供原初268_576d李蘗聞有西洋學裝送李承薰.

6>. 성세를 주기 전에 많은 문제를 물어보자 모두 잘 대답하였다.(달레 상, 306- ).

= 하늘이 주신 기회 + 천지창조와 종말 +천체의 움직임 + 영혼육신의 결합 +강생구속과 천당과 지옥의 상선벌악 = 우리 민족을 구원하시려는 하느님의 섭리이네!

=몇 권의 책을 읽어보고 + 이벽의 부탁으로, 천주당을 찾아 서양선비에게 실천방법을 배워오게. 우리 민족의 큰 문제가 자네 손에 달려 있으니, 부디 경솔하게 행동하지 말게!

= 선교사와의 약속

1. 배교강요에는 모든 형벌과 죽음도 감수하겠다. + 여러 여자를 데리고 사는 것도 않겠다. 2. 고향으로 돌아가면 인간의 공명을 버리고 가족과 함께 시골로 물러가서 영혼구령에만 전력하고자 한다.

3, 해마다 소식을 전하겠다. + 출발하기 전에 아버지의 승낙을 얻어 세례를 받음 + 사신들도 그들의 왕에게 서양 사람들을 그 나라에 불러들이기를 제청하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cf. 이응시 보록의 북경 첫 세례시 서약문을 제단에 바침 !).

=선교사와의 약속대로 이승훈은 1784말에 그라몽 신부에게 편지를 썼고, 그 편지 전달자는 17854월에 돌아왔으나 이미 (을사)박해가 시작되어 그라몽 신부의 답장과 책들을 빼앗겼다.(cf. 윤민구 4103).

5). 이승훈의 귀국과 연구.

1>. 1784년 봄에 귀국하여 이벽에게 책 전달과 6개월 연구(10년 이상 공부 후 + 4월부터 9월까지 연구) => 연구 후에 선교여행 + 가을 9월에 수표교 자택에서 첫 세례식(이벽, 권일신, 정약용, 정약전).

= 이승훈의 1789년 편지에, 내가 한un Savant성현을 만났사온데, 어려운 교리까지 잘 알고 있다./편지=4, 96, 98.

= 박해로 내가 형제들 모임을 떠나게 되어, 세례를 베풀도록 지명한 2명 가운데, 바로 그 성현(=이벽)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일 년 후인 1785(6?)년 가을경에 박해로 죽었다.( = 김범우를 말하며, 이벽의 순교는 17856. 14. 여름 <= cf.이벽전).  

2>. 1784년 공인 이씨(=이벽의 누님 1784) 기제사후 선상 선교(=선중씨 묘지명)

갑진년 415일에 맏형수의 기제(忌祭)를 지내고 나서, 우리 형제와 이덕조(李德操)가 한배를 타고 물길을 따라 내려올 적에, 배 안에서 덕조에게 천지(天地) 조화(造化)의 시작(始作)과 육신과 영혼의 생사(生死)에 대한 이치를 듣고는 정신이 어리둥절하여 마치 하한(河漢)이 끝이 없는 것 같았다. 서울에 와서 또 덕조를 찾아가 실의(實義)칠극(七克)등 몇 권(=천학초함 + 천주강생언행기략, 천주강생인의, 주교연기)의 책을 보고는 비로소 마음이 흔연히 서교(西敎)에 쏠렸으나 이때는 제사지내지 않는다는 말은 없었다(cf. 주교연기).

3>. 양근 감호 갈산에서 강의

과거(1784. 9/cf. 달레상 311=양근 감()산에서 강의!) 이벽(李檗)이 처음으로 서교(西敎)를 선교(宣敎)할 때 따르는 사람이 많아지자, 문효세자(文孝世子 1782.10.- 1786.6.양력)를 가르치는 동궁(東宮)의 관원(官員)이 된 권철신의 집이 있는 양근 감호를 방문하여, “감호(鑑湖)는 사류(士類)가 우러러보는 사람이니, 감호가 교에 들어오면 들어오지 않는 자가 없을 것이다.” 하고, 10여 일을 묵은 뒤에 돌아간 일이 있었는데, 그때 공의 동생 일신(日身)이 열심히 이벽을 따랐다. (보감에는 양근 갈산 ! ).

4>. 17849월에 수표교의 이벽 성조의 자택에서, 이승훈은 이벽, 권일신, 정약전, 정약용에게 세례를 주었다.(추국 1801. 2.18. + 달레상 307) + 이어서 중인 계급의 최창현, 최인길, 김종교 등 학식과 덕망이 뛰어난 이들을 입교시켰다.(달레상 308).

+인천에서 권일신이 권철신에게 쓴 편지를 읽고(추안1801 1차 심문중/주재자 흠숭 + 삼혼설과 4근본원소(cf. 주교연기 17-12의 생혼, 각혼, 영혼과 화,,,)... 그래서 이몸도 그 책들을 보았습니다.), 암브로시오로 세례받음(달레 상311. + 1790. 10. 16.구베아 주교의 편지는 천명도 넘는 사람에게 세례를 주었다).

6). 이벽과 이가환, 이기양의 교리 논쟁! 

1>. 이가환: 황사영 백서 47-52

갑진-을사무렵(겨울/정헌 묘지명)에 이벽에 굴복당하여, [천학초함]과 함께 [성년광익]까지 가져다 거듭 읽고는 믿기로 결심하고, 제자들을 권유하여 교리를 가르치고, 아침저녁으로 이벽 등과 비밀리에 왕래하며 열심히 하였다. /1789년에 윤유일이 밀사로 갈 때 은자 500(5천만원 정도=징의 232,김시준 240)을 봉헌하였고, 1799년에 충청도 보령에서 압수된 신자 연명부에 이가환이 우두머리로 실려있고(벽위편), 부연사가 되어 직접 북경에서 영세하려 하였다.(백서) 신유박해를 맞아 권철신과 함께 장폐로 순교하였다.

* 이가환이 회담 날자를 정하여 이벽의 집에 모였다. 호사가들의 한 떼가 이 굉장한 토론을 참관하여, 사흘 동안 진행된 끝에 이가환이 패배하여, ‘이 도리는 훌륭하고 참되다. 그러나 이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불행을 갖다 줄 것이다.’ (달레상 308). 

2>. 그 후 이기양도 토론을 견뎌낼 수 없었고( 달레 상 310),

이기양이 안순암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이들은 안정복도 신자가 되도록 설득하려 하였다.

1. 안순암이 권철신과 이사흥에게 보내는 편지 1784(12?)

2. 안순암이 이사흥에게 답하는 편지 을사 1785년 봄

=저번에(1784?) 성오 (권일신)이 힘써 이 학문을 내게 권하였지만, 내가 귓전에 지나가는 바람을 듣듯이 하였네!               

7). 을사 1785년 박해로 이벽성조의 순교  

=천진암성지의 기도공동체(=한국천주교회창립)=>수표교의 세례 공동체가 되었고, 양반 외에 중인들까지도 모일 수 있도록, 중인 김범우의 집이 있는 명례방집회로 변화하였다. 

= 을사 1785(3)봄에 이승훈은 정약전, 정약용 등과 함께 장례원(@한글본 성교요지 용지) 앞에 있는 중인 깁범우 집에 모여 집회를 가졌다. 이벽이라는 자가 있어, 푸른 두건(=[미살제의]에 나오는 청건으로 대림.사순절에 사용)으로 머리를 덮어 어깨까지 드리우고, 아랫목에 앉아서, 이승훈과 정약전,약종,약용 삼형제 및 권일신 부자가 모두 제자라 일컬으며, 책을 옆에 끼고 모시고 앉았는데, 이벽이 설법하고 깨우쳐주는 것이 우리 유가에서 스승과 제자간의 예법보다 더욱 엄격하였다. 날짜를 약속하여 모이는데 두어 달이 지나니 양반과 중인 가운데 모이는 자가 수십 명이 되었다. 추조의 금리가 - 드디어 체포하고 예수의 화상과 서적들 및 몇가지 물건을 추조에 바쳤다. 추조의 판서 김화진은 그들이 양반의 자제로서 잘못 들어간 것을 애석하게 여겨서 타일러 보내고 다만 김범우만 가두었다. 권일신은 그의 아들과 이윤하와 이총억 과 정섭 등 다섯 사람을 데리고 바로 추조에 들어가서 성상을 돌려달라고 여러 차례 호소하였다. - 꾸짖고 달래어 내어보내고, 다만 김범우를 신문하여 정배시켰다. (김시준, 벽위 95). 

* 1785을사박해로 이벽 성조의 순교 + 집안들의 문중박해(이승훈, 정약용/권철신은 父亡!)

1789편지(cf. 윤민구 4103) = 박해가 4/5곳에서 일어나 체포 + 감옥 = 10명 넘게 피를 흘리며 증거!

*백서 45- 이승훈은 아버지의 엄한 반대와 악우들의 비방에도 끝까지 참고 성교를 봉행-隨後厥父嚴禁 惡友亂謗 承薰猶忍耐奉敎!

8). 이승훈의 신앙 고백. 

벽이시. 문은 오히려 깃발을 드는 글(=1791.11.13. 거상중의 이기경 상소문에서)이다.

= 그러자, 이승훈의 아비 이동욱과 정약전의 아비 정재원은 비로소 그의 아들이 사학을 배우는 것을 알고, 크게 놀라 죄를 다스리고, 친지들의 집을 두루 다니며 스스로 뉘우치고 깨달았음을 말하게 하고, 또 이승훈으로 하여금 사학을 배척하는 글을 짓게 하여 스스로 변명하게 하였다. (벽위편)

= 아버지의 焚書에 대한 벽이시 (天彛地紀限西東 暮壑虹橋唵靄中 一炷心香書共火 遙瞻潮廟祭文公. =이는 현재에도 살펴보면, 배교시가 아니다.) + 벽이문(=이기경은 1791.11.13.거상중의 이기경 상소문에서)은 불교와 같다는 것을 배척하는 것뿐으로, 오히려 천주교의 깃발을 드는 것이라고 했다. 僞天主云云者 只斥其非天學 --爲眞天學立幟而不見其闢之也 = 이기경 벽위편, p.146; 김시준역 벽위편, 156) + (주재용, 가톨릭사의 옹위, p. 100).

=옹위 59/ 을사박해 - 소위 벽이문. 시를 지었나? = 달레의 기록에, 아비 동욱은 아들이 배교했다고 전하고 승훈에게 척사문을 짓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승훈은 북경에서 영세하기 전에 아버지의 승낙을 받았다. 

=오히려 1786년에 권일신이 조동섬과 함께 8일동안 용문산사에서 피정한 후에, 모방성직제도를 세워 열심히 기도하며 전교하고 있음을 볼 수있다.

= 또한 24세로 1780년에 진사에 급제한 이후 泮會에 자주 출입(물이 3면을 반달 모양으로 싼 동소문 부근)하며 문과를 준비하였는데(이후 동생 이치훈도 문과에 급제하였다), - 1787 정미 반회사건이 있을 때(옹위 55, 77=벽위편 103), 漢枌楡社(한고조의 고향 느릅나무 신=地神에 제사)에 대한 시를 거부함(벽위편 155).

= 또한 주재용, 옹위 p. 100 + 이기경, 벽위편, 1978 한국교회사 영인본, p. 91.,

'이기경이 이르기를, (承薰-- 晝夜誦經어반민김석태지가--累十卷冊子裏以錦袱 納之櫃中-- 早夜誦早晩課經) = ‘ 승훈이 주야 송경하고, 더욱이 수십 권 책자를 비단보에 싸서 궤 속에 넣어두고, 주야로 [조만과경]을 외우더라.   

<김학렬의 견해 = 위의 내용들을 보면, 이승훈 자신은 양심상 결코 배교하지 않았다. = 이승훈의 1789년 편지에도 자신의 배교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모방성직제도의 죄만 독성죄로 반성하고 있다. cf. 윤민구 4, 93). 

*=윤유일이 권일신과 이승훈의 1789년 편지를 가지고 북경에 갔을 때, 왕명을 받은 관리였던 오 요한은 북경에서 직접 세례를 받았고, 선교사의 미사도구 등 물품이 왕의 짐짝 속에 들어 있었다.(cf. 구베아 주교의 편지 + 정조실록 1790.3.3.에서, 의주 부윤 이이상이 정사 이성원에게 보내는 왕의 (특별문서)諭書를 어천 찰방 조형수가 책문에까지 급히 달려가서 전달하려는 것을 막았다고 보고한다.).

<김학렬의 견해= 초정 박제가의 병오소회를 읽은 정조는 서양 선교사들을 입국시키려는 계획을 비밀리에 추진하였다고 여겨지는데, 이는 1789년 윤유일 편에 들여오는 왕의 짐짝 속에 있는 미사도구등 교회 물건을 책문에서부터 검사하지 않고 통과시키라는 특별 유서였을 것이다. 결국에는 유서가 전달되지 않고도, 교회의 물건들이 발각되지 않고 전해졌으므로 죄를 묻지 않은 것으로 하였다.) <= 정조실록14/1790-03-03 의주 부윤 이이상이 사관이 책문에 가려함을 허락치 않고 대죄하는 장계를 올리다. 

=1790(6) 이승훈의 답장에서, 집안이 아직도 박해의 손아귀에 있어 자유롭지 못한 상태로 노력하는 것은 저의 의무이나 + 현 상황에서 신자들을 돌보기는 불가능하니 이 의무에서 면제를 요청하고 있다. (1790년 년중 7주일에 씀= 6월 초).  

* 평택 안핵사에 김희채(=이승훈의 재종 매부) + 제사금령을 지키려고 한 이승훈 !

= 정조 임금은 1791년 평택 안핵사에 김희채(이승훈의 재종 매부)를 임명함으로써(벽위편 188 + 순조실록), 이 사건을 얼버무리게 하였다.

=백서45-46/1790년 가을에 평택현감으로--, 1791년에 체포되어 배교하고 성교를 비방하는 글을 여러 번 썼으나, 그것은 모두 자기 본심에서 우러나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을묘1795년에 신부가 이 나라에 온다는 말을 듣고, 회개하고 성사의 은혜를 받기 위한 준비를 하였으나, 얼마 안되어 박해가(=실포사건에서 3인 장폐) 일어나 다시 움츠렸습니다.(1795 이승훈 예산 유배) ---겉으로는 세속을 따랐으나, 항상 다시 떨치고 일어날 생각을 -- 선사인지 더 두고 조사해 봐야 할 것. 

*일성록 1793. 12. 27/ 박향영(朴向榮)을 자여 찰방으로, 이승훈(李承薰)을 양구 현감(楊口縣監)으로 삼았다. 

* 대저 주문모를 영입하려던 계책은 이가환, 홍낙민, 이승훈, 지황 등이 주장한 바에서 나왔습니다. 만약 신부가 아니라면 7성사를 거행할 수가 없고, --큰 배가 오는 것은 아득히 먼일 -- 중원에서 한 신부를 모셔오는 방편만한 일이 없다고 생각(사학징의 92, 유관검 신문기록).

<김학렬의 견해 =병오1786소회에서 초정 박제가의 의견을 받아들인 정조 임금은, 관리 오요한을 시켜 미사짐을 왕의 짐짝 속에 들여오게 한 것으로 보인다. 1795년에 일부의 짐은 정약용의 집에 있었다(218일자 이승훈 진술), 이승훈이 1801년 공초에서 진술하고 있어, 정약용도 주문모 신부의 입국에 관여한 것으로 추측된다.>  

9). 이승훈 공초 내용 

의신矣身으로 시작되는 이승훈의 결안 전문이 게시되어야 한다.(이기경의 벽위편 p. 310. 26일자). [자료집 I]에서는 西洋邪書 卽載籍以來로 시작하였으나, ‘矣身親受領洗로 시작되는 전문을 게시해야 한다. 이승훈이 사형당하는 이유를 밝히는 자백이요, 이 자백 때문에 처형된 것이기 때문이다. 

<판결안 번역; 저는(矣身) 직접 영세를 받았고, 만리 밖에서 책을 구입해다가 모든 친척들에게 전파하여 서울과 시골의 멀고 가까운 데에까지 미치게 했으며, 이것도 오히려 부족해서 서양사람과 왕래하며, 다른 무리들을 얽어 뭉쳤고, 흉악하고 비밀한 계책은 윤유일과 같이 하였으며, 음험하게 속이는 자취는 정약종과 연결하였습니다. (저는 겉으로는 유교로 회개하는 척했으나, 그 속 마음은 실로 고혹적인 천주교를 품은자로서) 요망하고 추한 무리들은 저를 보고 교주라고도 하고 대부라고도 하였는데, 요서와 요언은 모두 무리를 침혹하는 도구로 사용하였습니다. 자백을 받고 참에 처하였다.( 죄인 승훈 운운 --矣身親受領洗 --부동유일 --결연약종 --外稱革面 內實蠱心妖黨醜類 -- 矣身爲敎主爲代父 --왕법지엄요서요언전용 혹리?적실 遲晩.). => 순교자이다. Ecco! il martirio!  

* 矣身의신의 표현에 관하여 참고할 사항으로, 

1). 공문서의 기록(영조실록 원년 1724. 12. 8. + 정조실록 61782. 6. 28.)을 참고하여 보면, 나를 표현할 때는 자를 쓰고, 낮추어 저라고 표현할 때는 矣身을 사용한다.   

2). 승정원일기 인조 22년 갑신(1644) 321(기유)에서, 공초에 관한 번역원의 각주를 보면, [-D001] 다음과 같이 공초하였다 : ‘저는이라는 뜻의 矣身이라는 말과 함께 문목의 조목에 따라 하나하나 진술을 한 내용이 적혀 있다. 

3) 사학징의 1권 정법죄인질 김현우를 보면,

맏형 김범우는 도모, 둘째형 김이우는 발라바, 저는 마두라고 했습니다.’ / 矣身則馬頭(아전이 瑪竇마두를 잘 몰라서 발음 나는 대로 쓴 것이고, 發羅所(=바 소)는 발라바이다.(cf. 조광 역주, 사학징의 I, p. 253 각주 316 참조). 

4). 정약용 약망의 공초 내용. =저의 집안에 정약망이라는 이름은 없습니다(cf.사진 문헌).

* 정약용의 신앙과 관련하여 볼 때, 그는 참회하며 종부성사를 받고 선종하였다.

*정약용의 신앙은 탕약망 (아담 샬) 신부가 지은 [주교연기](1643년에 간행되어 소현세자를 만났을 때 기증하였을 것.)를 통해 補儒闢佛보유벽불’(324b)과 제사에 대해 계속 보존해야할 우량한 습속이란 내용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탕약망은 보유의 의미로 養孫入養까지 실행하여, 시종의 아들을 湯士弘으로 입양).

*정약용은 179755일 단오에 도성을 떠나, 미음의 김매순에게서 일박한 후 소내와 천진암을 방문하여 시문을 남기고 있다. 이후 621일에 동부승지사직소를 제출하며, ‘제사를 폐한다는 말은 신이 예전에 본 글에서는 한 번도 보지 못하였습니다.(승정원일기=而至於癈祭之說, 臣之舊所見書, 亦所未見)’하며, 보유론을 견지하고 있다. 이는 선중씨 묘지명에서도 반복되는 내용이다. =이때는 제사지내지 않는다는 말은 없었다.(而此時無廢祭之設.-後世必有知其心者矣). 

* [修身西學수신서학]1782년에 외규장각이봉문서에 포함되어 있는데(배현숙 글 5), 소순태의문답 1892번에 의하면(아래 주소에서 확인), 정약용이 이 글을 읽고 [孟子要義맹자요의 1814년작]에 반영함으로써, 학유에게 준 가계(시문집 18권 가계, 1810)처럼 멸문지화를 방지하면서도, 수백 년 후의 역사에 부끄럼이 없는 글을 남기려 한 것으로 나타난다. 2018. 2. 11. 김학렬 약망 신부 끝.

http://bbs.catholic.or.kr/home/bbs_view.asp?num=8&id=28524&menu=question_and_answer  

p. s. 각주와 첨부 사진 자료 등에 대하여서는 첨부 파일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첨부파일1 : 201821413451320244.hwp
Writer : 김학렬 신부   Date. 2018-02-14 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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