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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 풍경소리

  • 이번주 풍경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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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번주 풍경소리


敎會 일에 敎會內의 反對와 妨害의 歷史 回顧
韓國天主敎會 現代史에서 敎會 일에 反對와 妨害의 敎訓的인 歷史를 回顧해 본다. 교회의 공식 사업에 반대하는 이들은 대부분이 이름이 알려진 성직자들이나 교수직에 있는 분들이다. 물론 좋은 뜻으로, 교회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반대한다.그러나 반대하기 전에 반대 내용에 대하여 깊히 연구하고, 반대하지 않고 주장하며 지지하는 이들의 학식과 직업도 인정해야 한다.또 책임 당사자와도 함께 토론해보는 성의와 예의는 있어야 할 것이다. 필자의 짧은 일생에 몇가지 이야기를 후학들에게 알리고 싶다.

① 1960년대 후반기에 서울에서는 저명한 분이 현재의 서울 원효로가 새남터라는 주장으로 새남터 성지를 반대하는 주장을 제기하였고, 따라서 장소가 틀렸다며, 현재의 새남터는 새남터가 아니므로 순교 성지가 아니라는 반대이론이 당시 많지도 않던 교회 내 매스컴에서 10여년간 논란이 있었다. 새남터 성지 담당신부는 필자에게, 토지 확보를 주저할 수 밖에 없었고, 결국 성지성역화에 막대한 지장을 받았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현재의 새남터가 바로 범주교, 정신부, 나신부, 김대건 신부, 등이 순교한 현장이라는 것이 반대자들도 부정할 수 없어 재확인되었을 때는 이미 주변 땅값은 치솟을대로 치솟은 후였다. 

② 1970년대 초에 수원에서는 전국에서 처음으로 평신도지도자교육 3개년계획을 수립하여 본당과 공소의 회장들 전원을 대상으로 제2차바티칸공의회 문헌,[평신도 사도직활동에 관한 교령]을 교과서로 쓰는 교육이 실시되었는데, 일부의 심한 반대와 비협조로 중단에 중단을 거듭하며 시행하였었다. 당시 교회와 사회가 만나서 자리를 함께하는 [수원가톨릭쎈타] 건립은 수차례에 걸친 우여곡절 끝에 지금까지 못하였고, 당시 새마을 운동을 교회차원에서 근본적으로 계획한, [가톨릭농촌사회지도자교육원] 설립도 실무자의 잦은 인사이동으로 불가능하게 되었다.(필자는 당시 교육원 창설 원장이었다)

③ 1980년 초, 정하상 묘를, 남의 별장 울타리 안에서 발견하여 이장이 불가피한 상항이었는데, 6개월간이나 [순교복자 정하상 묘 발견]을 발표하고 이장위원회를 구성하여 이장추진을 하였었으나, 역시 엄청난 반대로 위원장 주교도 단념케 되었고, 결과는 파묘 소각의 비극을 겪었으며, 화장된 유골잔재를 긁어모아 서글픈 이장을 할 수 밖에 없었다.(필자는 당시 이장위원회 총무였다)

④ 1981년도 천진암 터가 여주군에 있다는 엉뚱한 반론으로 사회 일간 신문에까지 현재의 천진암 성지를 반대하는 글을 올려서, 현재의 천진암 터가 틀렸다고 반대하였었으나, 현재의 천진암 성지가 정확하다는 것을 나중에 가서야 반대자들도 인정하게 되었다.(필자는 당시부터 천진암 성지 성역화 개척의 책임사제였다)

⑤ 한국순교복자 103위 시성을 추진은 불가능하고 불필요하다는 목소리로 극구 반대하는 이들이 대단하였다. 특히 천주교회의 관심을, 반군사정부 민주화투쟁으로부터 다른 방향으로 돌리려 한다는 것이었다. 즉 되지도 않을 103위순교복자 시성추진으로 돌리려한다는 정치적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103위 순교복자의 시성은 성사되었다.(당시 필자는 5년간 103위 시성추진부장이었다)

⑥ 한국천주교회200주년기념사업과 기념행사에도 반대의 목소리는 아주 심하였다. 그러나 5년간에 걸친 그 축제분위기는 한국천주교회 발전의 일대 분수령이 되었다.(필자는 당시 주교회의 200주년위원회 사무국장이었다)

⑦ 특히 1984년도에 로마 교황의 한국방문을 추진하자는 안건을 1982년도부터 제시하였는데 이에 대한 일부의 반대는 아주 심하였었다. 교황이 訪韓하면 전두환 대통령이 국제적으로 公認되므로, 오시지 않게 해야 한다는 정치적인 이유였다. 그러나 교황은 다녀가셨다.(필자는 당시 주교회의 200주년위원회 사무국장으로 5개년 계획 立案者였다)

⑧ 1981년, 황사영 진사의 묘를 찾아 발굴 확인한 후, 주변 토지 3천여평을 (당시 평당 2만원 내외, 현재는 3백만원 내외) 매입하려하자, 황사영 묘가 아니라고 반대하는 목소리 때문에 몇 차례 시도에도 부득이 좌절되었다. 지금은 황사영묘로 자타가 인정하고 비석도 세웠으나, 반대하며 다투는 동안 황진사 묘 주변에는 러브 호텔이 5개가 신축되어 둘러 싸고 있어서, 남의 호텔 뒤란을 통과해야만 황진사 묘를 참배할 수있다.(필자는 당시 유일한 성직자로서 고국상 기자, 황용호 교수와 황진사 묘 최초 확인,발굴자였다)

⑨ 1982년 충주 하담의 정약전 묘와 정재원 묘, 정지해 묘, 등 정약용 선생의 부모 형제들 묘가 토지 소유주에 의하여 강제 이장되는 상항이라서, 후손 종친회 이사들의 문서상 만장일치 요청으로 천진암으로 이장하려 할 때, 후손도 아닌 성직자들이 아주 심하게 반대하여, 중지하였었는데, 2년 후 반대하던 이들이 필자에게 애걸하다시피 계속 간청하고, 주교 두분도 거듭 간청하므로, 마침내 천진암으로 옮겨 안장하였다.(당시 필자는 그 이장위원회 총무였다)

10) 최근 꽃동네 오웅진 신부 타도를 위해 공개적으로 목소리를 높이던 사람들은 대법원 무죄판결이 났으니, 분명 오신부 타도에 힘을 실어주던 그 처신들은 정의구현이 아니고, 중상모략이었고,국민들의 자선심을 짖밟아 버리는 잔인한 악행이었으며,실로 있을수없는 반대요 박해였다. 얼마나 많은 국민들의 착한 마음을 진이겼는가? 꽃동네에 끼친 윤리적이며 경제적인 손해에 대하여 반드시 어떤 모양으로든지 저들은 배상해야 한다는 것이 법률이전의 국민들 양심의 소리요, 정의구현의 요구다. 오웅진 신부가 명예훼손, 손해배상, 등의 민사, 형사상 소송이나 고발을 하지 않아도,저들의 범죄행위와 배상의무는 영원히 잔존하는 것이다.
그러나 일언반구 사과발언조차 아니하는 자세와, 아직도 자중할 줄 모르고 고발, 폭로와 문제 제기나 규탄과 타도를 서슴치 않는 일부 경솔하고 천박한 정치인들 처럼,신중할 줄 모르는 자세는, 비록 자신의 생각에는 올바르고 유명한 일을 하여 매스컴의 촛점을 받는 일을 한다고 여겨지더라도, 자신의 신분에 합당한 처신은 아닐 수 있다.특히 자신이 몸담고 있는 단체나 공동체에 무슨 피해를 주는 지도 생각해야 한다.이제 한국천주교회 신자들의 순교신심에 타격을 주고,신앙의 선조들께까지 상처를 입힐 수 있는 근거가 빈약하고 매우 경솔한 자세로, 신앙을 거부하는 이들까지 동원해서, 교회를 찌르고 할퀴고 꼬집고 하며 대드는 것은 無知가 아니고 不義요,惡意가 아닐 수 없다.실로 마음 아프다.

11) 1975년 수원 조원동에 주교좌 성당 건립역시 엄청난 반대가 있었다.그러나 성당은 완공되었다. 북문 밖에 마을도 없는 보리밭 기증받은 땅에 300여평이나 되는 큰 성당은 절대로 짖지 못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김남수 주교의 의지로 완공되었다.

?? 1982년부터 오늘의 수원대신학교 설립 추진 때, 교구 사제단도 절대다수가 강력히 반대하였었다. 그러나 신학교는 되었다. 역시 김남수 주교의 의지로 이룩된 것이다.

12) 1990년대에 와서 인천 대신학교 설립 때 극렬하게 반대하는 사제들이 있었다. 인천 나주교님이 某 신부와 함께 천진암에 와서, 필자의 소견을 물은 적이 있었다."없는 신학교를 세우는 것은, 있는 신학교를 없애는 것보다 훨씬 더 잘하는 일”이니, 세워야 한다고 대답해드렸던 기억이 난다.

13) 로마 베드로대성당 건립과정과 스페인 바르셀로나의 성가정 성당 건립과정을 보면 말못할만큼 반대하는 성직자들이 있었다. 특히 아프리카 Ivory Coast의 Yamuskro 대성당은 1990년대에 5년간에 완공한 3만명 수용의 아프리카에서 가장 큰 대성당 건립이었는데, 그나라 전국 주교들과 사제들이 단결하여 반대하므로, 기공식 미사도 못하였고, 낙성식 미사할 성직자도 없었다. 그러나 교황 요한바오로2세께서 친히 가셔서 축성하시며, [Templum Dei Signum Dei super Terram !] 즉,"하느님의 聖殿은 地上에서 하느님을 알리는 標識!]라는 제목의 유명한 강론을 하셨다.

충분한 이유없는 반대나, 충분히 알아보지도 않고 하는 반대나, 정치적 목적으로 하는 반대는 박해의 일종이 아닐 수 없는, 반대를 위한 반대라는 것을 깨달아야 하겠다. 남의 일에 반대하기 전에 자기가 맡은 자기 일이나 우선 제대로 잘 해야 할 것이다. 필자는 지금까지 한 평생 남의 일에 반대하거나 공격한 적이 없다. 내 일에 바쁘니, 남의 일에 눈을 돌릴 겨를이 없는 것이다. Msgr. Byon

Writer : 천진암    Date : 2008-01-17 01:11   Hit. 30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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