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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 풍경소리

  • 이번주 풍경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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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번주 풍경소리


서울,수표교, 韓國天主敎會 創立址 표석을 읽으며,,,
서울,수표교 부근 이벽 성조의 집터가 있던 지역에 세운,
韓國天主敎會 創立址 표석을 읽으며,

晩時之歎이 없지 않으나, 반갑고, 고맙고,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서울대교구 순교자현양위원회(위원장 최창화 몬시뇰)의 힘든 力作에 우리 모두 감사와 찬사를 드립시다. 다만 옥에도 티가 있다고 하듯, 보는 눈에 따라 한두 가지 아쉬운 점이 있으나, 그 중에 반드시 앞으로 轉用과 波及을 예방코자 우선 한 가지를 밝히고 싶습니다.

[이벽]이라는 漢字語 이름을 [李檗]대신 [李蘗]으로 새겼는데, 물론 천주교 박해자들이 신유년 박해 이후, 闢衛編 등 일부 기록에서, 즉,"이벽의 동생 이석은 아주 요사스럽고 괴이한 인물로서, 그 형 이벽은 사악한 천주교에 제일 먼저 푹 빠진 자로 사특한 천주학의 始祖라는 것은 만인이 모두 다 잘 아는 사실이 아닌가!(李晳卽一物怪人妖也,其兄蘗之最先溺邪一世之耶共知也-이기경의 벽위편 신유년 조)"에서 보듯, 檗과 蘗을 混用하는 경우가 있지만, 人名에 관한 한, 家門과 宗親會에서, 부모와 형제들의 생존 시에 發刊한 族譜와 墓誌石에, 또 이벽 성조의 自筆 기록문헌에는 모두 [檗]으로 썼고, 특히 大學者 丁若鏞 선생은 그의 모든 문헌에서 항상 [檗]으로 썼으니, 몇가지 예를 들겠읍니다.

1776년 15세의 정약용 선생이,결혼인사차 천진암에 와서 作詩하여 이벽 이벽성조에게 증정한 詩文을 보면,공께서는 聖賢의 學德과 호걸의 氣魄을 골고루 갗우시고, 出家僧처럼 어려서부터 덕을 닦아, 얼굴에는 늘 慷慨한 모습이 차고넘치십니다(贈李檗,,,,賢豪氣相投,令德勉早修,慷慨常見面).

1784년 22세의 정약용 선생이, 천진암 天學 총림(叢林), 즉 젊은 선비들의 天學信徒 단체의 본거지가 서울 水標橋 부근 이벽성조 自宅으로 移轉되던 날, 斗尾津 船上에서 지은 詩文 제목에서,同友人李德操 檗 乘舟入京….하였습니다.

1797년 35세의 정약용 선생이,이벽성조께서 세상을 떠난 후 12년 후에 형 丁若銓, 丁若鍾과 함께 단오날 천진암에 와서 이틀을 머물면서 지은 端午日陪二兄游天眞 詩文에서는, 李檗이 讀書處 시설물이 아직도 그대로 있으나, 苑公이 깃들이던 흔적은 벌써 아득하여 다시 찾기 어려우나, 그 풍류와 문채는 모름지기 신령한 경지에서였으니, 그 시절 그리워서 한나절내 술마시고, 또 한나절내 詩를 읊어보노라(李檗讀書猶有處, 苑公棲跡杳難尋, 風流文采須靈境, 半日行杯半日吟) 하였읍니다.

1814년 52세의 정약용 선생이 강진 유배지에서 쓴 中庸講義補 첫머리의 序文에서도, 광암 이벽이 수표교 근처에서 독서(연구)할 때(曠菴 李檗 在水橋 讀書….)라고 하였습니다.

1816년 54세의 정약용 선생이 강진 유배지에서 쓴 先仲氏墓誌銘에서는, 형 약전과 자신은 일찍부터 이벽을 추종하며, 천문,지리,수학,기하원본, 및 새로운 종교(天主敎)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몹시 기뻐하였다(嘗從李檗, 游聞曆數之學, 究幾何原本…. 聞新敎之說, 欣然以悅然…)고 적고 있읍니다.

1822년 60세의 정약용 선생이 회갑하던 해 마현 고향집에서 쓴 鹿菴權哲身墓誌銘에서는, ‘비로서 이벽이 首領이 되어 천주교를 선전하자, 추종자가 이미 군중이 되었으며, 권철신의 아우 권일신도 열성으로 이벽을 추종하였다.(始李檗首宣西敎, 從者旣衆…. 公之弟 日身熱心從檗…).’ ‘일찍이 기해년(1779년) 겨울에, 천진암에서 講學이 있었을 때, 주어사는 雪中이었는데도, 이벽이 밤에 앵자산을 넘어와서 삼베 두루마리 풀어놓듯, 촛불을 많이 켜놓고, 경서를 논하였으며,,,(昔在己亥冬, 講學于天眞菴, 走魚寺雪中, 李檗夜至, 張燭談經, 其後七年, 而謗生此,,,) 하였읍니다.

1801년 신유년 박해 때 기록된 朝鮮王朝實錄에서도, [檗]으로 쓰고 있으니, “저 이벽이라는 자는 이 사특한 무리의 가장 큰 괴수이며,,, 사특한 무리의 괴수 이벽의 형 이격은,,, 만일 사특한 무리들의 큰 괴수는 바로 이벽이다,,,”하였습니다.
被李檗者最是邪黨中巨魁…. 邪魁李檗之兄李格…. 若論邪黨之巨魁則李檗是已…. <朝鮮王朝實錄, 純祖 元年 辛酉 3月>

推案及鞫案에서도, [檗]으로 쓰고 있으니,“갑진년(1784년) 간에 정약용과 더불어 이벽의집에 모여서,,,이벽한테서 요사스러운 책을 얻어 같이 보았도,,,”하였습니다.
甲辰年間與丁若鏞會於李檗家…. 得見妖書於李檗與之同見…. <推案及鞫案 純祖一年, 辛酉邪獄 罪人 李家煥 等 推案一>

최근 史學者들(최석우 신부님, 이원순 교수님, 김옥희 수녀님, 김학렬 신부님, 등)이 한국천주교회 역사에 관하여 저술하거나 역술한 문헌을 보니, 모두, [李檗]으로 쓰고 있으나, 일부 史學人들의 글에서는 아직도 [蘗]으로 쓰는 경우도 없지 않으니, 李檗 曠菴 公 本人의 自筆 기록문헌을 따라서라도, 앞으로는 모두, [李檗]으로 쓰는 것이 합당하다고 하겠습니다. Msgr. Byon

관련 사진

1. 이벽성조의 친필. 2. 수표교 부근에 세운, 韓國天主敎會 創立址 표석.
3. 한국천주교회 창립 터 표석. 4.이벽성조의 묘지석. 5. 청계천 수표교 옆 석벽의 으름넝쿨에 열려서 익은 으름.


서울 청계천 李檗 聖祖의 집터가 있던 水標橋 부근 도로변에 세워진 表石.

서울 청계천 李檗 聖祖 집터가 있던 水標橋 부근 도로변에 세워진 표석.

曠菴 李檗 聖祖의 自筆

청계천 수표교 아래 옆 석벽에 올라간 으름넝쿨에 으름이 열어 익었는데도 손을 대지 않고 그래도 두니, 서울특별시의 소년소녀들은 참 양반입니다!(2011년 9월 30일 현재)

李檗 聖祖(1754~1785)의 墓誌石,1979년 6월 21일 포천군 내촌면 화현리에서
발굴(卞基榮 神父)

Writer : 천진암    Date : 2011-10-03 09:41   Hit. 29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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