天眞菴聖地

바로가기메뉴
주메뉴바로가기
서브메뉴바로가기

유틸메뉴


주메뉴


서브메뉴

天眞山메아리

  • 天眞山메아리
성금 봉헌 안내시복시성 추진성지안내 조감도

본문내용

글자 작게 하기글자 크게 하기
天眞山 메아리
  1. 天眞山 메아리


창립선조들 시복에 참고해야 할 자료
역사학만으로는 간과하기 쉬운 교회사 자료
<창립선조들 시복에 참고해야 할 자료>
 
- 역사학만으로는 간과하기 쉬운 교회사 자료 -
 
1. 대선배 주재용 신부님께서 [한국 가톨릭사의 옹위, 1970]란 글에서 많은 부분을 밝혀놓으신 바 있고, 이를 토대로 김학렬 신부는 평화방송 tv에서 수차례의 강의를 통하여, 창립선조들의 순교를 증언한 바 있습니다. 이러한 내용은 천진암성지의 역사자료실과 동영상 자료에 수록하여 놓았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종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 132위에 대한 [시복자료집 제 1]을 구독하여 본 결과, 時空상 사실에 더 가까운 자료들이 누락되거나 간과되어있음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2. 교회사를 올바르게 정립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공정하고 정확한 자료수집에 이어서, 이를 신학적 바탕 위에서 올바르게 분석하고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교회사는 신앙생활을 다루고 있으므로, 신학 지식이 부족한 사람은 교회사를 제대로 수집. 분석. 이해할 수 없습니다. 작은 그릇에는 더 큰 진실을 담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정약용 若望의 종부성사(날짜)를 부정하는 유학자들의 경우가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3. 확증을 원한다면 Avvocato diabolo(=Advocatus diaboli, 악마의 변호인, 교황청 시성성의 요원)의 말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반론은 정론을 밝히는데 자극요인으로 작용하기에, 모든 일이 서로 작용하여 좋은 결과를 내도록 이끌어주기 때문입니다. (cf. 로마서 8, 28). 경교비문에 대한 양마낙(디아즈) 신부의 설명 글(=[경교유행중국비송正詮] 가운데 원죄에 대한 부분)에서도, 성 아우구스티노의 말씀을 인용하여, 복된 죄를 논하고 있습니다(奧斯定聖人嘆曰幸哉人罪緣主降世成人贖人).
 
4. 하느님의 종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 132위에 대한 [시복자료집 제 1]에서 간과되거나 누락된 한국천주교회 창립선조들에 관한 내용을 김학렬 若望 신부가 제시하는 다음의 보완된 새자료(Novita')에 의거하여 바로잡아 주시기를 청하오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2017. 12. 3. 동양의 사도 축일에, 김학렬 약망 신부.
 
p. s.
 
4회에 걸쳐 나누어서 연재할 예정입니다. 알아볼 만큼의 생략어를 사용하였고(급하게 정리되었니 Qui habet aures audiendi audiat!), 사진과 각주 등의 자세한 자료는 첨부 파일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 다 음 ==================
 
1. 하느님의 종 이벽 요한 세례자.
 
1). 프란치스코 교황이 인용한 황사영백서.
 
프란치스코 교황은 선출되던 해 부활절에, 로마교회의 창립자인 베드로 사도의 묘소를 참배하였다. 한국천주교회의 창립 사실을 잘 알고 있는 프란치스코 교황은, 2015. 3. 12. 로마교회의 창립자들인 베드로와 바오로 사도의 묘소를 방문한(Ad Limina) 한국 주교들에게, ‘한국의 첫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신앙을 교회의 성사생활로 온전히 나타내기 전부터 이미 예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이루어, 신앙과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며 살았습니다.’(사도 4, 32 참조) 하며 강조하였다. 또한 이에 앞서 방한 중에 (2014. 8. 14.) 한국주교들에게 한 말씀 속에서도, ‘이벽과 첫 세대 양반 원로들은 평신도였고, 그들 스스로 개척해 나갔습니다.’(일어나 비추어라, p. 21) 하였다.
 
* 프란치스코 교황이 인용한 자료는 황사영의 백서 101-102행이었다.
(cf. 김시준역 벽위편 p. 306).
 
동방의 우리나라에서 주님의 은혜는 다른 나라보다 월등하게 컸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일찍이 전교자가 온 일도없이, 주님께서 특별하게 직접 가르치시며 손을 맞잡아 이끄셨고, 이어서 성사를 베풀어 줄 이를 주시는 등, 내리신 갖가지 특은을 손가락으로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습니다.’
 
(백서101/主恩之於東國 可謂逈越尋常 初未嘗有傳敎者來
而主特擧斯道而親 102/舁之繼 又以()援聖事者予之 種種特恩 指不勝屈.)
 
이러한 표현은, 서양 성직자 선교사들의 도움 없이, 평신도들이 자발적으로 공부하고
기도하면서, 직접 하느님 나라의 진리에 도달한 천진암강학을, 황사영이 잘 알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 cf. 천진암성지 역사자료실 / 2015. 6. 16.).
 
* 모두가 (줄비,김시준역 벽위편 4002)(낮을비)자로 읽으며 지나쳤으나, 김익진 선생과 교황청에서만(=천진암성지에서는 이를 알려준 바가 전혀 없음) 그 의미를 알고 올바로 읽은 (마주들 여)자 하나로 분위가 완전히 바뀐다. 어린아이의 걸음마를 돕는 모습이 천진암강학과 겹쳐 연상되기 때문이다.
 
2). 한국천주교회 창립.
 
2-1). 보감(1906), ‘조선에 천주성교회 창립하니라’.
 
한국천주교회의 출발에 대하여 창립(創立)이라는 말을 쓰기 시작한 것은 1906년에 경향잡지의 전신인 보감 제1권 대한셩교샤기에 연재된 교회사 기사에서부터였다. ‘2장은 죠션교회의 비로삼과 몬져 귀화한 자를 의론함이라에서, 첫 머리에, ‘바야흐로 죠선에 텬주셩교회 창립하니라하였다. 이로부터 약 100여 년간을 두고, 조선천주교회 창립 이라는 말을 경향잡지와 가톨릭청년 등, 이른 바 교회 언론에서 계속하여 사용하여 왔다.
 
2-2). < 모방 신부의 1838 년 편지 >
 
Extrait d'une lettre de Mr Maubant miss. Ap. en Corée à Mr Langlois Superieur du Seminaire des Missions Etrangères. Yangtchi 3 Xbre 1838. <자료수집 확인: 최승룡 신부> :
 
"[]Nous avons pu cette année nous procurer secrètement des notes manuscrites sur l'établissement de la Religion Chretienne en Corée. Elles diffèrents peu de celles que j'avais composèes d'après la tradition orale,,,,,En 1720 la 58e annèe du fameux Kanghi, un autre ambassadeur Corèen nommé Y eut une entrevue avec les Missres. de Pekin et reçut d'eux des livres Chretinne qu‘il emporta en Corée. Un nommé Koang, qui reçut le surnom de Jean, ayant lu ces livres, eut le bonneur de sentir et de gouter les verités qu’ils renfermaient. Il embrassa la religion Chretinne et de concert avec quelques autres prosélytes il envoya en 1783 à Peking un autre délégué égalemant nommé Y, mais d'une autre famille, pour prendre de plus amples informations sur cette religion sainte. Y s'adressa aux Missres. français et en fevrier 1784 fut baptisé, sous le nom de Pierre[]"
 
번역/ 조선 선교사 모방 신부가 파리 외방 전교회 신학교 교장 랑글로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 양지에서 1838123.
 
[ 금년에 우리는 조선에 그리스도교의 創立에 관하여, 손으로 기록한 備忘錄을 비밀히 관리하도록 받을 수가 있었는데, 口頭로 듣던 바와 크게 다르지는 않습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1720, 중국 年號로 저 유명한 康熙 58년에, 북경에 다녀온 使臣 李公(李頤命)이 서양 선교사들한테서 천주교 책들을 가지고 조선으로 돌아왔습니다. 이 책들을 구해 읽은 광이라는 사람(曠菴 李檗)은 후에 요한이라는 교명을 가진 분입니다. 이 사람이 천주교 교리에 同感하고 深醉한 나머지, 천주교를 全心으로 받아들였고, 몇몇 다른 改宗者들과 함께 힘을 합하여, 1783년에 또 다른 가문 출신의 같은 성을 가진 이(승훈), 이 거룩한 종교에 관하여 더 많이 알아오도록, 또 다른 代理者北京에 파견하였습니다. (승훈)17842월에 베드로라는 교명으로 세례를 받고 오게 되었습니다.”]
 
2-3). 페낭 신학교 교회사 교과서.
 
*. 페낭신학교 역사 교과서에 이런 내용이 들어 있다.
우리나라의 3번째 신부들(정규하, 강도영, 강성삼)부터 배운, 말레시아 페낭신학교의 1885년판 교회사 교과서를 보면,
COMPENDIUM HISTORIAE ECCLESIASTICAE, PULO-PINANG 1885, SUPPLEMENTUM p. 136.
 
Q. QUAENAM FUIT HAEC RATIO ?
(어떤 근거(사유)가 있었나?)
 
R. 한국의 왕들은 해마다 중국의 황제에게 조공을 바치는 사신들을 보내곤 하였다. 이 사신들은 여러 번 북경의 처소(천주당)에서 예수회원들을 만났을 뿐만 아니라, 자연과학과 참된 종교에 관하여 박식한 선교사들이 중국어로 번역한 책들을 받아 가지고 돌아왔다. <1632-1720>
 
Q. 어떻게 이런 책들이 한국인들을 신앙에로 이끌었는가?
 
R. 그때에, 어떤 조선의 선비들이 고적한 곳으로 물러가서 철학 공부를 하였다 ; 그들 가운데 특출한 사람들은 이덕조(Ni-Tek-Tso)로서 별호가 벽이(Piek-i , 즉 고집이 센 /완고한 사람 =obstinatus)라는 이와, 권철신(Kuen-Tsiel-Sin-i), 그리고 정(Tieng)씨네 두 형제들(정약전/Tieng-Jak-Tsien 과 정약용/Tsieng-Jak-Iong)이었다. 그들은 인간 본성과 하늘과 세상에 대하여 다양한 문제를 검토한 후, 그리스도교 서적들을 탐구하기 시작하였다. 섭리와 영혼, 덕행과 죄악에 관한 교리에 대하여 선으로(좋게) 판단한 후, 꾸준히(statim) 자기들 나름대로(mores suos) 하느님의 계명을 (적응)훈련하는 데 열중하게 되었다. (1770)
 
Q. 어떻게 신앙에 진보하게 되었는가?
 
R. 1783년에 이벽의 친구인 이승훈이(Ni-Seung-Hun-i) 사신들과 함께 북경으로 가서, 거기서 베드로란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고, 다음해에 십자가와 성화들 외에 많은 종교서적들을 가지고 돌아오면서, 선교사들한테서 본 모든 사실들과 저 유명한 Alexandro de Govea O. S. F. 북경 주교한테서 배운 것들을 전하였다.
 
Q. 이 진리의 탐구자들에게 무엇이 요구되었는가?
 
R. 이벽은 새 서적들을 아주 열심히 탐구하였고, 공적인 토론회를 통하여 이름난 학자들을 굴복시키고, 많은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회개시켰다. 한편 이승훈 베드로는 이벽에게 세례자 요한이란 이름으로 세례를 주었다. 동시에 어떤 박사가 이벽으로부터 신앙에 인도되어 거룩한 샘에서 씻기움을 받았는데, 그는 프란치스코 사베리오란 이름을 받은 권일신(Kuen-Il-Sin-i)이었다; 권일신은 미구에 자기 제자인 젊은 이단원(Ni-Tan-Uen-i)을 그리스도께 인도하여, 알로이시오란 세례명으로 불리게 되었다.(1784) 세 명의 선각자인 베드로와 세례자 요한과 프란치스코 사베리오는 똑같은 열성으로 신앙의 진리를 자기 동향인들에게 전하는데 몰두하였다.
 
2-4). 김대건 부제의 Generalis notitia super nascentem ecclesiam Coreanam(조선 천주교회 탄생에 관한 보고서), 서울 18453.
 
"Inter eos celebrior fuit vir nomine I Pieki (nomen baptismi Joannes Baptista) .= 그 선비들 가운데 제일 특출한 사람은 이벽이었습니다."
 
2-5). 고틀랑 주교의 1845. 7. 8. 강남 편지
 
고틀랑 주교는 서울에서 김대건 부제가 작성한 조선천주교회탄생에 관한 보고서를 참고하면서 (김대건 부제의 1845. 7. 23.자 편지 참조)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글을 남겼다. 고틀랑 주교는 김대건 부제를 포함 12명의 동행자들에게 고해성사를 주었고, 김대건 신부의 서품식에 참여한 고틀랑 주교의 1845. 7. 8.자 편지 속에서, 4명의 신앙탐구자들(=페낭 신학교 교과서와 같은 내용)을 언급하고 있다. (이는 고틀랑이 김대건 부제가 쓴 위의 글을 읽었거나 또는 직접 들려주어서 알았던 내용일 것이다).
 
그 무렵 조선에서는 4명의 지식인이(=김학렬의 주; 페낭신학교 교과서에 의하면, 이벽 권철신 정약전 정약용 = 4) 진리를 찾기 위해 애쓰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진지하게 진리를 찾으려했던 것 같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존재를 알게 되었는데, 그 나머지는 거의 진전시키지를 못했습니다. 그들은 북경에 보다 위대한 학자들이 있음을 알고는 그들에게 물어보기 위해 북경으로 가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리고 신앙을 받아들이고 교회서적들을 얻어서 돌아갔습니다. -- 그들 자신들의 신분과 상황에 따라 몇 사람은 주교, 몇 사람은 신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알고 있는 한 최대한 대로 정확히 성무를 수행했습니다. 지금은 912일입니다. 김안드레아 신부가 지난 817일 일요일에 상해 근처의 교우촌에서 신품을 받았습니다. 조선 감목구의 대목인 페레올 주교가 집전했습니다. - 그는 824일 일요일에 왕당의 신학교에서, 다블뤼 신부의 보좌를 받으면서 첫미사를 올렸습니다. -- 그 다음주 일요일 831일에 페레올 주교와 그 동료들은 자기 선교지로 가기 위해 조선 쪽배의 갑판에 올랐습니다.’ (cf. 2017. 김정숙 번역).
 
2-6). 최양업 신부의 1851. 10. 15.자 서한.
 
중국의 서적들을 연구하여 그리스도교의 기본을 터득한 이벽에게 부탁을 받은 이승훈이 북경에 가서 북경주교를 찾아갔고, -- 세례를 주었습니다.’
 
2-7) 달레 상 302, 천진암강학은 기도공동체로 발전.
 
즉시로 그들은 새 종교에 대하여 아는 것을 전부 실천하기 시작하였으며, 매일 아침저녁으로 엎드려 기도를 드렸다. 7일 중 하루는 하느님 공경에 온전히 바쳐야 한다는 것을 읽은 후로는 매월 7, 14, 21, 28일에는 다른 일은 모두 쉬고 묵상에 전심하였으며, 또 그날에는 육식을 피하였다. 이 모든 것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극히 비밀리에 실천하였다.’
 
<김학렬의 견해 = 이들의 행동은 기도와 재계로 신앙을 실천한 것으로서, 이미 신앙 공동체가 형성이 된 것이다. 또한 세례를 원하는 Catecumeni (=세례 준비자들이며, 예비신자란 표현은 번역의 오류이다.)로서, 이미 교회의 한 가운데 와 있는 사람들이다.(교의헌장 14항 참조) >.
 
3). 이벽이 잘 준비시킨 이승훈의 세례.
 
김학렬의 견해 = 이승훈은 미리 잘 준비되어 북경에 파견되었고, 결국 세례를 받고 돌아왔다. 아무리 주변 신부들이 반대하였다고는 하나, 40여일 만에 필담으로 교리를 배워 영세하였다는 것은, 이벽이 잘 준비시켜 보낸 (=꾸며서 보낸<裝送> =이벽이 몰래 읽고있던 성서인 [천주강생언행기략][주교연기] 등을 읽으며 준비하였을 것이다.) 사실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준비된 북경행이었다는 근거문헌은 황사영의 백서에, (백서44/ 布衣李檗大奇之-承薰 李檗密托曰 北京有天主堂 堂中有西士傳敎者--求信經一部 幷請領洗--必勿空還.) ‘이승훈은 벼슬하지 않는 선비인 이벽이 아주 기특히 여기고 있어, 이벽이 이승훈에게 은밀히 부탁하였습니다. 북경에 가면 천주당이 있고, 성당에는 서양 전교자가 있으니, 기도서를 구해오고 더불어 영세를 청하여 받고, -- 빈손으로 돌아오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4). 이승훈의 귀국과 이벽의 연구와 선교.
 
* 1784년 봄에 귀국하여 이벽에게 책 전달과 6개월 연구(10년이상 공부에 이어 + 17844월부터 9월까지) => 선교여행 + 가을 9월에 수표교 자택에서 첫 세례식 (이벽, 권일신, 정약용, 정약전).
 
= 이승훈의 1789년 편지에,
 
= 내가 un Savant 한 성현을 만났사온데, 어려운 교리까지 잘 알고 있었다./ + 윤민구, 자료4, 96, 98.
 
= 박해로 내가 형제들 모임을 떠나게 되어, 세례를 베풀도록 지명한 2명 가운데, 하나는 바로 그 성현(=이벽)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일년 후인 1785(6?)년 가을경에 박해로 죽었다.( = 김범우를 말하며, 이벽의 순교는 1785. 6. 14. 여름 <= cf. 이벽전).
 
= 1784년 공인이씨(이벽의 누님 1780.4.15.) 기제사후 선상 선교(cf. 선중씨 묘지명)
 
갑진년 415일에 맏형수의 기제(忌祭)를 지내고 나서, 우리 형제와 이덕조(李德操)가 한배를 타고 물길을 따라 내려올 적에 배 안에서 덕조에게 천지(天地) 조화(造化)의 시작(始作)과 육신과 영혼의 생사(生死)에 대한 이치를 듣고는 정신이 어리둥절하여 마치 하한(河漢)이 끝이 없는 것 같았다. 서울에 와서 또 덕조를 찾아가 실의(實義)칠극(七克)등 몇 권 (=천학초함 + 천주강생언행기략, 천주강생인의, 주교연기?)의 책을 보고는 비로소 마음이 흔연히 서교(西敎)에 쏠렸으나, 이때는 제사지내지 않는다는 말은 없었다.(=탕약망의 [주교연기]에서 보유벽불補儒闢佛을 언급한다).
 
= 양근 감호 갈산에서 선교.
 
과거(1784. 9/cf. 달레상 311=양근 감산에서 강의!) 이벽(李檗)이 처음으로 서교(西敎)를 선교(宣敎)할 때 따르는 사람이 많아지자, 문효세자(文孝世子 1782.10.- 1786.6.)를 가르치는 동궁(東宮)의 관원(官員)이 된 권철신의 집이 있는 양근 감호를 방문하여, “감호(鑑湖)는 사류(士類)가 우러러보는 사람이니, 감호가 교에 들어오면 들어오지 않는 자가 없을 것이다.” 하고, 10여 일을 묵은 뒤에 돌아간 일이 있었는데, 그때 공의 동생 일신(日身)이 열심히 이벽을 따랐다. (cf. 감호암 사진 + 보감에는 양근 갈산).
 
=17849월에 수표교 이벽의 자택에서, 이승훈은 이벽, 권일신, 정약전, 정약용에게 세례를 주었다.(추국 1801. 2.18.+ 달레상 307) + 이어서 중인 계급의 최창현, 최인길, 김종교 등 학식과 덕망이 뛰어난 이들을 입교시켰다.(달레상 308).
 
= 인천에서 권일신이 권철신에게 쓴 편지를 읽고(추안 1801 1차 심문중/주재자 흠숭 + 삼혼설 + 4근본원소... 그래서 이몸도 그 책들을 보았습니다.) // 암브로시오로 세례받음/달레상311. + 1790. 10. 16.구베아 주교의 편지는 천명도 넘는 사람에게 세례를 주었다.
 
5). 이벽과 이가환, 이기양의 교리 논쟁!
 
= 이가환: 황사영 백서 47-52/ 갑진-을사무렵(겨울/정헌 묘지명)에 이벽에 굴복당하여, [천학초함]과 함께 [성년광익]까지 가져다 거듭 읽고는 믿기로 결심하고, 제자들을 권유하여 교리를 가르치고 아침저녁으로 이벽 등과 비밀리에 왕래하며 열심히 하였다. /1789년에 윤유일이 밀사로 갈 때 이가환은 은자 500(5천만원 정도=징의 232)을 봉헌하였고(김시준역 벽위편 240에서는 50), 1799년에 충청도 보령에서 압수된 신자 연명부에 이가환이 우두머리로 실려있고(cf. 김시준역 벽위편 222), 부연사가 되어 직접 북경에서 영세하려 하였다.(백서) 신유박해를 맞아 권철신과 함께 장폐로 순교하였다.
 
*-달레상 308/ 이가환이 회담 날자를 정하여 이벽의 집에 모였다. 호사가들의 한 떼가 이 굉장한 토론을 참관하여, 사흘 동안 진행된 끝에 이가환이 패배하여, ‘ 이 도리는 훌륭하고 참되다. 그러나 이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불행을 갖다 줄 것이다.’ 하였다.
 
*-달레상 310 / 그 후 이기양도 토론을 견뎌낼 수 없었고, 이기양이 안순암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안정복도 신자가 되도록 설득하려고 하였다.
 
1. 안순암이 권철신과 이사흥에게 보내는 편지 1784(12?)
 
2. 안순암이 이사흥에게 답하는 편지 을사 1785년 봄
 
=저번에(1784?) 성오 (권일신)이 힘써 이 학문을 내게 권하였지만, 내가 귓전에 지나가는 바람을 듣듯이 하였네!
 
= 김시준역 벽위편 233/ 이기양의 좌우전후의 모든 친척들이 사학에 물들지 않은 사람이 없고--- 아들 총억이 추조에서 한 공술에는 그 집에서 축출당했다고 하였고, 기양의 문초에도 서로 어긋남이 없으니 -- 단천에 멀리 귀양보냈다.
 
6). 을사 1785년 박해로 이벽성조의 순교.
=1.천진암성지의 기도공동체(=한국천주교회창립)=>2.수표교의 세례 공동체가 되었고, 양반 외에 중인들까지도 모일 수 있도록 =>중인 김범우의 집이 있는 3.명례방의 기도 집회로 변화하였다.
 
=(김시준역 벽위편 95)/ 을사 1785(3)봄에 이승훈은 정약전, 정약용 등과 함께 장례원 (@한글본 성교요지 용지) 앞에 있는 중인 깁범우 집에 모여 집회를 가졌다. 이벽이라는 자가 있어, 푸른 두건(=미살제의에 나오는 靑巾으로 대림.사순절에 사용)으로 머리를 덮어 어깨까지 드리우고, 아랫목에 앉아서, 이승훈과 정약전,정약종,정약용 삼형제 및 권일신 부자가 모두 제자라 일컬으며, 책을 옆에 끼고 모시고 앉았는데, 이벽이 설법하고 깨우쳐주는 것이 우리 유가에서 스승과 제자간의 예법보다 더욱 엄격하였다. -- 권일신은 그의 아들과 이윤하와 이총억 과 정섭 등 다섯 사람을 데리고 바로 추조에 들어가서 성상을 돌려달라고 여러 차례 호소하였다. -- 꾸짖고 달래어 내어보내고, 다만 김범우를 신문하여 정배시켰다.
 
7). 이벽성조의 사인이 확인된 한승호 교수의 검안서. (cf. 수원교구 50년사 1, p. 37).
 
* 1785을사박해로 이벽 성조의 순교 + 집안들의 문중박해(이승훈, 정약용/권철신은 맹용1780!).
 
* 한승호(스승 권흥식 교수의 검안을 재확인) 교수의 검안서를 통하여, 이벽 성조의 죽음의 원인은 역병이라기보다(달레 상 321), 경기감사이던 이익운이 살해한 아들 이명호 요한의 독살 순교와 같은 경우로 확인되었다. 이벽 성조의 죽음(페스트)에 대한 아블뤼의 기록은 문중에서 흘린 거짓 정보에 의한 것일 수 있다. 신자들에게 문상도 오지 않게 하기 위해 지어낸, 거짓 홍보내용을 그대로 기록한 것일 수 있는 것이다. 전염병을 핑계로 삼아 문상을 오지 않게 한 이러한 사례는 윤지충 모친상의 경우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
 

첨부파일1 : 201712610272024172.hwp
Writer : 김학렬 신부   Date. 2017-12-06 10:27
다음글 : 역사학만으로는 놓치기 쉬운 교회사 2
이전글 : 미사경문이 바뀐다는데, 참고해야할 원천(2)
우리나라천주교회창립사
천진암성지 소식지(2019년 1월호)
ebook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