天眞菴聖地

바로가기메뉴
주메뉴바로가기
서브메뉴바로가기

유틸메뉴


주메뉴


서브메뉴

天眞山메아리

  • 天眞山메아리
성금 봉헌 안내시복시성 추진성지안내 조감도

본문내용

글자 작게 하기글자 크게 하기
天眞山 메아리
  1. 天眞山 메아리


8월 15일은 大韓民國 建國紀念日이며,聖母 昇天大祝日! 낮12시 미사 -
8월 15일은
大韓民國 '建國 紀念日' 이며,
天主敎會 '聖母 昇天 大祝日' 이고,
天眞菴 聖地의 韓民族 國花 ‘無窮花 紀念日’ 이다 !
 
8월 15일은 대한민국 건국기념일이며, 천주교회 성모 승천 대축일이고, 천진암 성지에서는 韓民族의 國花, 무궁화 기념일로 경축하기도 합니다. 천진암 성지에서는 낮 12시에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미사를 봉헌하며, 때마침, 로마 교황 프란치스꼬 성하께서 방한하시어, 대전에서 아시아 각국 청소년들과 함께, 아시아의 평화를 위하여 미사를 봉헌하시니, 오늘의 우리나라가 받은 큰 은총이다.
 
차제에 8월 15일, 대한민국 건국에 관련된 천주교회의 잊혀져가는 대한민국 건국활동사와, 대한제국 고종황제의 天主信仰을 되새겨 보며, 國花 무궁화의 내력을 살펴보자.
 
-애국가 원형 소개-
 
1897년, 8월 16일, 조선왕국의 마지막 임금, 고종 임금님은 서울 중심, 지금의 시청 앞 광장 동남쪽 조선호텔 정문 앞 자리에 동구단 만들고, 각국 사신들이 참석하는 가운데, ‘朝鮮王國’을, ‘大韓帝國’으로 선포하고, 고종황제로 취임하였읍니다. 이날 불렀던 애국가의 原形 古語文을 찾아내는 이들에게 감사하며, 간단히 살펴보면;
 
上帝保佑/皇帝聖上 /聖壽無疆/海屋籌山/威權 瀛廣/于千萬歲/福祿無窮/上帝保佑/皇帝聖上/
상뎨(上帝)는 우리 황뎨를 도으ᄉᆞ셩슈무강(聖壽無疆)ᄒᆞᄉᆞᄒᆡ옥듀(海屋籌)를 산(山)갓치 ᄡᆞ으시고위권(威權)이 환영(環瀛)에 ᄯᅳᆯ치사오쳔만셰(於千萬歲)에 복녹(福祿)이일신(日新)케 ᄒᆞ소셔상뎨(上帝)는 우리 황뎨(皇帝)를 도우소셔
 
 
上帝保佑/皇帝聖上/聖壽無疆/海屋籌山/威權瀛廣/于千萬歲/福祿無窮/
上帝保佑/皇帝聖上<상제보우/황제성상/성수무강/해옥주산/위권영광/우천만세/복록무궁/상제보우/황제성상>
 
그 大義를 풀어보면,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의 뜻이 담겨 있습니다. 물론 이 애국가의 原本이나 眞本, 寫本, 등에 관한 연구가 더 필요하며, 1900년대 초부터도 조정의 큰 공식행사에서는 종종 불렀다고 볼 수도 있다. 좀 쉽게 풀어보면,
 
上帝는 우리 皇帝를 도우소서,
聖壽 無疆케 하시고,
海屋籌 山까지 다다르게 하시며,
위엄과 권세와 영광이 四海에 널리 펼쳐지게 하소서.
천만세에 이르도록 福祿이 날로 더욱 새롭게 하옵소서.
上帝는 우리 皇帝를 도우소서!”
 
<필자 意譯>
 
당시의 애국가는 물론 지금 우리가 부르는 애국가와는 가사나 곡조가 다르지만, 가사의 대의와 골격은 같다고 할 수 있다. 첫 문장은, 후렴으로 끝에 가서 반복 부르던 것으로 보이며, 于千萬歲의 于(우)를, 화와이 교포들이 부를 때, ‘오’로 옮긴 것이 보인다.
(http://narasarang.mpva.go.kr/data/music2.asp), 등, 여타의 문헌에서 퍼온 글이다.
 
-大韓民國 國號 來歷 -
 
1910년 한일합병으로 나라를 빼앗긴 후, 1919년 3월 1일, 독립운동이 발발한 이듬 해, 중국 상해에 집결한 한민족의 대표적인 지도자들은, ‘황제의 나라’, ‘大韓帝國’을, ‘백성의 나라’, ‘大韓民國’이라고 부르며, 상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하였습니다. 또한 大韓은 三韓은 물론, 지금의 요령성과 길림성 지역의 옛 고구려와 발해의 강토를 포함하는 韓民族의 국가들을 의미한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으로, 세계 2차대전이 끝나고, 美.蘇. 양대국의 점령하에 남북이 분단되자, 온갖 난관을 극복하면서, 특히, 남한의 미국식 자유민주주의 제도를 실행하려는 정권과 북한의 소련식 自由不在 공산주의식 정치 조직의 충돌로 많은 어려움을 겪다가, 3년 후, UN 대표 참관단을 소련의 영향하의 북한이 거부한 가운데, 1948년 5월 10일, 마침내, 한민족 역사상 최초의 자유 총선거가, 미국의 영향하에 있던 남한만 실시하여, 제헌국회를 결성하고, 7월 17일에 헌법을 제정 선포하고, 우리나라의 국호를, 임시정부의 전통을 이어받아, ‘大韓民國“이라고 제정하고, 초대 대통령으로 이승만 박사를 선출하였으며, 8월 15일에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전 세계에 공포하였다.
 
2차 세계대전을 전후하여 대한민국의 건국을 위해 국내외에서 항일독립투쟁에 온 겨레가 힘을 모으고 있을 때, 천주교회가 한 일은 무엇인가? 너무나 많은 識者들이 모르고 있는 사실을 알리고 싶다.
 
사실 8월 15일은 가슴벅찬 우리나라 대한민국 건국기념일이다. 온 국민이 자자손손이 경축해야만 하는 뜻깊은 날이며, 건국 선조들에게 감사해야 하는 날이다. 이 기회에 대한민국 건국 전후에 천주교회가 대한민국 건국에 힘을 보탠 역사를 더듬어 보자.
 
- 천주교회의 대한민국 건국활동사 개요-
 
한국 건국에 美國 Spellman 추기경과 中國 우삔(于斌)대주교, 한국 노기남 대주교의 잊혀진 활동 略史.-
 
해외에서 대한민국 건국에 기여한 외국인 주교들의 잊혀진 活動 略史와 2천년 천주교회사를 훑어보면, 하느님께서는 신도들의 애절한 기도를 들으시고, 天上의 聖人聖女들 축일이나, 특히, 사도시대부터 거의 1900연년 동안 천주교회 신도들이 기념하며 경축하는 천상의 어머니, 성모 마리아의 기념축일에 종종 무서운 전란이 종식되는 특은을 베풀어주시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우리나라도 그러하다고 볼 수 있다.
 
1941년. 12월. 8일(성모 무염시태 축일)에 일본이 하와이 진주만을 기습 공격하면서, 세계 2차대전은 마른 봄의 산불처럼, 특히 아시아에서, 일본의 연전연승으로 확전되기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일본이 승리하는듯 하였다. 성모님 축일에 전쟁을 일으키면, 성모님 축일에 반드시 망한다는 중세 유롭의 속담이 있는데, 사실 일본은 1945년 8월 15일 성모승천축일에 무조건 항복하는 패전을 당하였다.
 
1935년 로마에서 대주교로 서품되어 뉴욕 대교구장이 된, 미국의 천재적인 영웅 성직자 Spellman 몬시뇰은 , 빈민국 푸에르토리코, 등 남미에서 몰려오는 60 여만명 밀입국 이민들을 보살피면서, Spellman 대주교는 약소민족의 설움을 체감하였고, 미국 역사상 유일하게 대통령에 4선 당선한 Roosevelt 대통령과 절친한 오랜 친구 사이로서, 2차 대전 중에는 미국 육.해.공.군의 합동 군종사령관으로 임명되어, 3,300여명의 종군신부들과 2500여명의 군종 목사들의 총 지휘관으로 전투 현장을 누비며 장병들을 격려하였고, 동시에 미국 대통령 특사로도 임명되어, 중국(장계석), 영국(처칠), 소련(스탈린), 등 유롭과 아시아의 정상들을 수시로 방문하며, 전쟁 확대 예방과 축소를 위하여, 세계 평화 조성을 위해 동분서주하므로서, 당시 미국 내에서는 軍.官.民과 정치계에서 최고의 존경과 신망을 받는 고위 성직자였다.
 
1943. 11월. 27일, Spellman 대주교는 에집트 Cairo 회담 전후에도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을 뒤에서 보좌하며, 대통령 특사로서 약소민족들의 自治權, 특히 한국의 독립을 위하여, 당시 세계의 유력한 관련 정치 지도자들을 만나, 설득시키는데 주력하였다. 당시 중국 장개석 총통의 정치 고문으로 장총통과 절친한 南京 대교구장 우빈(于斌) 대주교를 일부러 찾아가 만나서, 한국 독립과 약소민족의 민족자결주의 當爲性을 알리며, 약소민족들의 독립국가 수립 지원을 강조하였다. 히틀러의 독일과 일본의 약소민족 점령주의를 막아야 한다는데 굳은 확신을 지니고 있었다.
 
1945년 7월 26일, Spellman 대주교는 포스담(Potsdam), 회담에까지 루스벨트와 함께 가서, 회담에 참석한 장개석 총통과 처칠 수상, 스탈린 소련 공산당 서기, 등에게 약소민족들의 民族自決主義, 특히 한국의 독립 지원을 배후에서 틈틈이 역설하며, 루스벨트 대통령 특사의 역할을 하였다 .당시 미국에 머물며 한국독립 운동에 투신하던 이승만 박사가 훗날 귀국하자마자 노기남 주교의 주선으로 마련된 명동대성당에서의 환영식 중에, 또 중국에 머물다가 좀 늦게 귀국한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金九 主席도, 귀국하자마자 명동대성당에서 개최한 임시정부 요인들 귀국 환영미사 중 답사에서, 이승만 박사와 김구 주석은 각각 공식적으로 남경 우삔 대주교와 뉴욕 스펠만 대주교로부터 받은 성원를 공식석상에서 정중히 언급하며 천주교회의 주교들과 신도들에게 깊히 감사할 정도였다.
 
1945년 8월 15일, 성모 승천대축일에 일본 소화천황은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므로서 제2차 세계대전은 종식되었다. 미국의 원자폭탄 2개 투하로 항복하였다고, 흔히들 생각하지만, 일본은 무서운 군사제국이었으므로, 일본 군 장병들에게 후퇴, 항복, 같은 개념이 없던 아주 독종 군사대국이었다. 일본이 항복하게 되기까지는 전 세계신도들의 뜨거운 기도와 천상에 계신 그리스도의 어머니시며, 지상의 신도들의 어머니이신 성모 마리아의 도우심으로, 소화천황의 마음을 돌렸기 때문이었다. 
 
1945년 9월 8일 성모성탄일 축일에 미군은 한민족의 해방군으로서 소련군보다 한달 늦게서야 인천에 상륙하여 입국하였으며, 남한 내의 일본군 무장해제와 정권 접수를 현실적으로 진행시켜, 다음 날 9월 9일에는 서울에 입성하였다.
 
Spellman 대주교는 미국 Roosevelt 대통령 특사로서 2차대전 중에 전 세계를 순방하며, 전쟁 종식과 국제 평화정착을 위해 눈부신 활동을 하면서, 동시에 태평양 전쟁 발발로 미 육해공군 군종 총사령관으로서 전투현장들을 방문하며 장병들을 격려하던 차, 일본이 항복하자, 미군 하지 중장(Lt. General Hodge)을 대동하고, 9월 9일 서울에 입성하자마자, 일본의 조선총독부(중앙청)에서 하지 중장과 같이 일본 총독의 항복서명 문서와 함께 공식항복을 받았다.
 
1945년, 9월 9일, 순교자들의 피로 물든 조선교구 설정 기념일, 오후 5시에는 즉시, Spellman 대주교가 점령군 사령관 하지 중장과 함께 명동대성당에 와서 노기남 주교의 환영을 받으며, 태극기와 성조기를 내걸고, 사회 요인들과 함께 대한민국 해방과 연합군 승리를 감사하는 경축미사를 바쳤다.
 
1925년 7월 5일, 한국 순교자 79위 시복을 전후하여, 탁월한 역량을 지닌 스펠만 신부는 당시 로마에 머물면서 Paccelli 대주교(후에 교황 비오12세)와 함께 일하며, 한국 순교자들을 잘 알고 있었다. 이미 미국에서부터 수년간 한국독립을 위하여 활약하였던 스펠만 대주교는 환영 답사에서, “79위 저 순교복자들 그림은 로마에서 본 낯익은 성화이며, 순교복자 성가도 귀에 익은, 들었던 것”이라며, 한국순교자들에 대한 존경심을 표하였다.
 
1945년 9월 26일, 한국순교복자 79위 대축일에 노기남 주교는 명동대성당에서 미 군정장관 Arnold 소장과 고급 장교들이 대거 참석한 가운데 2차세계대전 종식으로 세계평화 회복을 주신 천주님과 이를 도와주신 성모님께 감사미사를 드렸고, 하지(Hodge) 중장은 부득이한 정객들 면담으로 불참하는 대신 전쟁종식 경축 멧세지를 보냈다.
 
그런데 점령군 사령관 미군 장성들과 영관 장교들은 명동대성당 예식에 올적마다 성당마당에서 많은 국내 요인들이 보는 가운데 땅에 무뤂을 꿇고 노기남 주교에게 깊히 절하면서 노기남 주교의 손가락에 낀 반지에 입을 맟추었다. 이는 당시 한국 지성인들과 사회 요인들을 엄청나게 놀라게 하는 광경이었고, 서울 시내에는 그 소문이 한동안 자자하여 오래 갔다. 36년간 일본에 점령당하여 무시를 받아오던 한국인들은, “천주교의 빨간 치마 입은 남자, 주교라는 사람이 도대체 어떤 지위의 인물이기에, 의기충천하던 점령군 사령부의 미국 개선 장군들도 만인이 보는 앞에서 한국인 노기남 주교에게 땅바닥에 무뤂을 꿇고 깊히 절하면서, 노주교의 손바닥에 입을 맟추는가!?”하며 놀라와 하였다. 천주학쟁이로 처형되던 한국에서, 천주교인들의 위신이 급상승하였다.
 
1945년 10월 16일, 미국에 머물던 이승만 박사가 귀국하자, 노기남 주교를 제일 먼저 예방하는 자리에서, 이승만 박사는, 미국서 Spellman 대주교와 G. M. Carrol 안신부와 재미 윤을수 신부, 및 중국 南京의 우빈(于斌) 대주교로부터 그동안 한국독립을 위해 받은 크나큰 특별 지원에 아주 진솔하게 정중한 감사를 표하였다. 독립군들의 전투현장 외에, 세계 4대강국 지도자들에게 직접 대면하여 수시로 한국 독립을 주장하는 말을 할 수 있던 사람은 미국 뉴욕 대교구장이며 루스벨트 미 대통령 특사였던 스펠만 대주교와 중국의 장개석 총통 정치 고문이었던 南京 교구장 우삔 대주교 뿐이었다고 볼 수 있다.
 
1945년 12월 8일 성모무염시태 축일에는 1주일 전(12월 2일), 상해 임시정부 요인들이 귀국하여, 여정을 풀자마자, 노기남 주교는 명동대성당에서 임시정부 요인들, 金九 主席과 金奎植 박사, 등을 위하여 환영미사를 함께 드렸고, 조국 해방과 독립을 위하여, 그동안 임시정부의 노고와 희생에 감사를 드렸다.
 
이 날 환영행사 중에, 김구 주석은 공개적인 석상에서 답사를 통하여, 그동안 한국독립을 지원한 중국의 장개석 총통과, 그 정치 고문이었던 우빈 대주교의 협력에 진심으로 감사하면서, 특히, 1943. 11. 27. Cairo 회담에서, Roosevelt 대통령의 해외 미국 대통령 특사로 활약하던 스펠만 대주교의 성원은 지대하였음을 밝혔다. 또한 1945. 7. 26. 포스담(Potsdam), 회담에까지 장총통과 함께 참석하여, 회의참석자들, 처칠, 루스벨트, 스탈린, 장개석 등에게 회의를 전후하여, 약소민족의 자치권과 특히 한국의 독립을 역설해준, 천주교 Spellman 대주교의 지지와 성원에 깊히 감사한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 오랜 세월 일본의 속국 국민으로 숨을 죽이고 숨어다니던 김구 주석과 임시정부 요인들에게는 얼마나 고마운 일이었으랴!
 
1945. 11. 1일, 천주교회의 위령의날 축일에는 노기남 주교가 명동대성당에서 2차대전 중에, 특히 오끼나와를 비롯한 아시아 지역에서 전사한 연합군 전사자들과 특히 미군 전사자들 수 만명의 영혼을 위하여, 미 점령군 사령부의 민정장관 Arnold 소장과 많은 미군 장병들이 대거 참석한 가운데, 합동위령미사를 드렸다. 이때까지만해도, 점령군 사령관 하지 중장은 한국을 미국처럼 생각하고, 서울과 전국에서의 각 정당 창당을 자유화하여, 공산당, 특히 남노당(南朝鮮勞動黨)이 발빠르게 조직화하며, 활발히 확대하여 나갈 때였다.
 
그리하여, 한국 천주교회가 反共精神으로, 정치에 관심을 갖게 한 것은 북한의 공산당이 1945년 가을부터 북한 땅에 있던 여러 신부들과 수녀들을 체포하고, 교회 건물을 몰수하며, 천주교 박해를 시작하면서 부터였다. 특히 서울에서 精版社의 위폐제작 살포사건이 발각되면서 천주교회는 더욱 反共 경각심을 갖게 되었다.
 
1946년 성모성월의 5월 7일, 당시 解放日報, 人民報, 등 남한에서의 공산당 기관지 발행자들은 일본인들이 운영하던 화폐인쇄소인 치카자와인쇄소(近澤印刷所)를 발빠르게 차지하여, 精版社로 개명하고, 朴洛鐘과 宋彦弼, 등을 시켜 엄청난 위조지폐를 발행, 살포하여 경제대혼란을 일으켰으나, 곧 발각되어 체포되고, 曺在千, 洪以燮, 같은 저명한 검사 판사들에 의해 밝혀져, 주모자들은 미리 도피하고, 박낙종과 송언필 등만이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당시 美軍政廳에서는 이 사건을 처리하면서, 인쇄소 정판사를 당시 사상적으로 믿을만한 천주교회가 접수케 하여, 大建印刷所로 개명하고, 梁基涉 신부를 사장으로 임명하여, 출판사 준비를 시작하였다.
 
1947년 8월 1일부터 京鄕新聞(서울신문 전신).을 발행하게 되었으니, 이는 1906년에 창간하여 발행하여 오다가 일본이 폐간시켰던 京鄕雜誌의 복간 이상으로, 옛 月刊을 日刊으로 과감히 바꾼 발전이었다.
 
1946년 9월 16일, 김대건신부 순교기념일에는 김대건 신부 순교 100주년을 기념하여, 3일간의 강연회, 음악회, 등 기념행사를 거행하고, 1935년에 일본이 폐지한, 韓國殉敎者顯揚會를 재결성하였다. 이 해, 12월 12일, 점령군사령부에서는 한국 民政權을 한국인들에게 이양하여, 民政長官에 安在鴻 씨가 임명되었는데, 국내 治安을 위하여, 立法議院 구성에 천주교 대표로 장면 선생이 추천되어 참가하였다.
 
1946년 10월 9일, 미국 메리놀회 Byrne 신부가 초대 한국 교황대사로 임명되어 입국하자, 3일 후, 10월 12일에 명동대성당에서 노기남 주교는 환영미사를 드리고, 18일에는 미군정청과 천주교회가 古宮, 秘苑에서 환영 축하연을 공동개최하였다.
 
아직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기 2년 전으므로, 로마 교황청이 전 세계에서 최초로 우리나라(Corea) 대한민국을 독립국으로 승인하고, 교황대사를 임명한 것이다. 따라서 대사로서 제출하는 신임장을 받을 우리나라의 국가 원수도 아직 없을 때였다.
 
1947년 7월 7일에는, 일본이 폐지시킨 조선 천주교 청년연합회를 재결성 확대개편하고, 요한 장면 선생을 회장으로 선임하였으며. 8월 5일에는 천주교 여성청년연합회도 결성하였다. 천주교회도 정치적인 조직의 필요성을 절감하던 때였다. 북한에서는 평양 주교좌 대성당, 원산 주교좌 대성당, 함흥 주교좌 대성당, 연길 주교좌 대성당, 신의주 성당, 등의 천주교 성당들을 빼앗아 인민위원회 건물로 쓰면서, 신부, 수녀들을 체포 구금하며, 박해가 날로 심해질뿐더러, 남한에서도 남한의 순수한 村民들만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실로 조직력을 가진 공산주의자들만이 일으킬 수 있는 대규모 放火와 폭동과 반란이 대구, 여수 순천, 제주, 등 각처에서 그칠 날이 없어, 천주교회도 자발적으로 반공노선에 앞장서게 되었다.
 
1948년 5월 10일, U.N. 감시하에 남한에서만 5천년 역사에 최초로 자유 총선거를 실시하여 198명 제헌국회의원이 선출되었다. 천주교 대표로 장면씨도 당선되었다. 그러나 U.N.감시단의 입국을 거부한 북한지역은 자유 총 선거가 시행되지 못하였다. 우리나라에 드디어 국회가 구성되었으므로 ,6월 20일에 노기남 주교는 모든 국회의원들과 정계 요인들을 초청하여 명동대성당에서, 대한민국 독립 축하 경축미사를 드렸다. 초대 국회의장 이승만 박사는 축하 답사에서, “대한독립을 위해 해외에서 특히 미국 스펠만 대주교와 중국 우삔 대주교의 국제적인 지원활동에 대하여 천주교회에 다시 한번 깊은 감사를 표하고, 앞으로도 천주교회가 국가를 위하여 크게 이받이해줄 것을 믿고 기대하며 요청하였다. 뒤이어 제정된 헌법은 7월 17일에 선포하되었고, 이를 근거로 정부조직법, 12부 4처의 장관 임명, 등이 이루어져 대한민국 정부 조직이 우선 마무리되기에 이르렀다.
 
1948년 8월 15일, 성모승천대축일에는 헌법에 근거한 정부조직법을 따라 내각을 구성하고 드디어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선포하며, 절대다수 지지표를 받은 이승만 박사가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였다. 그러나 대한민국을 정식 국가로 인정하는 나라는 로마 교황청 외에 아직 하나도 없었다. 그리하여 이 해 9월 21일부터 프랑스 파리에서 U.N.총회가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이승만 대통령은 대한민국 정부를 U.N.이 승인하도록, 대표단을 파견키로 하였다.
 
수석대표로, 장면 선생 외에 조병옥 박사와 김활란 여사가 선임되었다. 그러나 당시는 우리나라의 국제 관계가 전무하던 시절이고, 국가 재정역시 빈약하여, 우리나라는 외교의 황무지 개척에 천주교회의 지원으로 실로 기적과 같은 결실을 내게 되었다. 특히, 북한 공산당의 천주교 박해로 인하여 수난하는 북한보다는 신앙의 자유가 있는 남한 대한민국의 U.N. 승인을 위해, 천주교회는 로마 교황청과 대사관계를 맺고 있던 전 세계 모든 나라의 외교부와 모든 국제 조직을 총동원하였다. 당시 노기남 주교는 주한 교황대사와 당시 파리외방전교회 한국 지부장에게 간청하여, 전 세계 70 여개 국과 외교관계를 맺고 있는 로마 교황청의 지원과, 파리외방전교회를 통하여 프랑스 정부의 지원, 그리고, 메리놀회를 통하여 미국 정부의 지원을 받고자 노력하였다.
 
특히, 프랑스 파리외방전교회 신부들은 한국 대표단 3인의 업무를, 자기들 일보다 더욱 중요하게 여기고 적극적으로 협력하였다. 심지어 한국대표단 3인의 숙소도 파리외방전교회 본부에서 길 건너에 있는 Lutetia 호텔 2층에 잡아주었고, 사무실과 타자기부터 시작하여 모든 업무에, 특히 각 언론기관과 각국 대표단 도착일과 숙소, 초청, 면담, 등 일체를 파리외방전교회 신부들이 파리 교황대사관과 함께 주선하여 주었다. 2차세계 대전 후 아직 전 세계 외교가의 질서가 정립되기 전이라서 U.N. 총회는 12월 초에 가서야 끝나게 되었다. 사실 대한민국 정부가 U.N.의 승인을 받는 데는 프랑스 파리외방전교회 신부들의 능동적인 참여와 봉사와 협력이 지대하였다. 한국은 늦었지만 마땅히 파리외방전교회 신부들의 노고에 감사의 뜻을 표해야 한다. 필자는 그래서 파리를 지날 때마다, 종종 Lutetia 호텔 1층 식당에 가서, 옛날, 장면선생, 조병옥 박사, 김환란 여사, 정부대표들이 늘 식사하던 자리에 가서, 옛 일을 되새며 식사하는 습관이 있다.
 
1948년 12월 8일 성모무염시태 축일에 절대 다수의 국가들이 48대 6으로 대한민국을 승인하기로 확정하였으나 발표는 다음 날 9일에 하게 되었다. 소련을 비롯한 공산권 몇몇 국가들의 반대 외에는 자유진영 대부분의 국가들이 우리나라를 같은 정식 국가로 승인한 것이다. 당시 국내의 공산당 진영에서는 통일 후 남북이 같은 한 나라로 승인신청해도 늦지 않는데, 왜 남한만 혼자서 승인을 받느냐고 연일 야단이었다.
 
그러나 UN의 승인 후,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 공산군의 남침으로 무섭고, 잔인하고 처참한 전쟁이 시작되자, 전 세계 50 여개 국가에서 우리 대한민국을 지원하며 참전하는데 있어, U.N. 총회의 승인은 여러 참전국들에게 참전의 근거와 합당한 이유를 주는 큰 힘이 되었다. 이 때 비로서 우리 노인 사제들은 성모님 축일의 신비로운 섭리를 느꼇다고 한다.
 
1949년 1월 1일, 로마 교황청 다음으로 미국이 대한민국을 독립국가로 인정하는 두 번째 나라가 되어, 한.미 국교관계가 수립되었다. 이 해 6월 14일에는 메리놀회의 Byrne 신부가 주교로 임명되어 축성되고, 경축미사에는 이승만 대통령을 위시하여 3부요인들이 명동대성당 예절에 대거 함께 참석하였다. 이 해에 대통령 특사로 임명된 장면 선생은 교황청을 방문하고, 교황을 알현하였으며, 주미대사로 임명되면서, 미국의 3개 대학교로부터 차례로 명예 박사학위를 받아, 그 이후로는, 국내에서도 “장면 박사”라고 부르기 시작하였다.
 
대한민국 건국 전후, 선배 성직자들의 눈부신 활약으로 당시 한국의 저명한 지도자급 主要人士들이 천주교회로 입교하게 되었다. 몇몇 분의 예를 들어보자. 평소 백범 김구 주석과 대화를 나누며 천주교 입교를 논하던 박병래 박사(성모병원 원장)는, 1949. 6. 26. 운명 전 金九 主席이 베드로라는 본명으로 대세를 받고 눈을 감고 운명하도록 도왔다. 그해 11월 20일에는 鄭春洙 목사(감리교 總理師, 3.1. 독립선언 33인 민족대표 중 1인)가 개종하여, 바오로 본명으로 노기남 주교한테 영세하였다. 洪震(상해 임시정부 의정원장, 귀국 후, 非常國民會 議長) 의장이 南相喆 회장 권유로 입교 영세하였다. 계속하여 많은 지성인들이, 특히 전쟁 후에는 명동대성당에서 윤형중 신부가 맡아하는 신입교우들을 위한 교리강의에 매회 신규 모집 때마다 지성인들 6,7백여명씩이 청강하여 입교하였다.
 
특히, 3.1.운동 독립선언 33인 민족대표 중 독립선언문 초안자로 근대 우리나라의 大碩學, 六堂 崔南善 선생의 천주교 입교는 한국 지성인들 사회를 크게 놀라게 하면서, 대단히 큰 영향을 주었다. 1957. 11. 17. 영세 바로 다음 날, 한국일보와 당시 라디오 방송에, “나는 왜 불교에서 가톨릭으로 改宗하였나?”라는 발표를 하여, 온 국민을 더더욱 놀라게 하였다.
 
1950년 6월 25일 주일 새벽, 38선 전역에서 북한 공산군의 남침으로, 서울이 3일만에 점령되고, 수원이 1주일만에, 대전이 3주일만에, 공산군에게 점령되면서, 실로 많은 성직자들과 회장들이 체포, 감금, 고문, 처형되었다. 미국의 Spellman 추기경(1946년 서임)은 장면 대사를 도와 미국과 U.N.이 공산 침략에서 대한민국을 구하도록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또한 Carroll 몬시뇰이 한국 전쟁 난민 구호에 미국 온 국민이 나서서 힘쓰도록, N.C.W.C.를 결성하여 지원하였고, 휴전 후에도, Spellman 추기경은 여러 차례 한국을 방문하고, 특히 성탄절을 전후하여, 휴전선에 근무하는 장병들을 위문 격려하므로써, 과거 젊은 날 군종 사령관의 정신과 사명을 잊지 않고 계속하였다. 후학들은 Spellman 추기경에 대하여 특히 연구할 필요가 있다고 느낀다.
 
1949년 6월 말 현재 당시 한국 교세 통계와 2013년 현재 통계 비교.
 
전국 6개 교구에, 주교 6명. 한국인 사제 144명(현재 4,647명), 외국인 사제 58명(현재 166명), 신학생 184명(현재 1,587명), 수녀 한국인 385명(현재 10,146명). 전국 본당 131개(현재 1,647개), 당시 서울의 본당은 14개(현재 226개), 신도수 북한 교우 10만내외 추산을 제외한 남한만의 신자 수는 15만 8천명(현재530만명이고, 영세예비 신입교우는 8,516명이다. 당시 서울시민은 150만 내외였다. 그러나 해방 후부터 특히 1950년 6. 25 사변을 전후하여, 북한 공산군한테 체포, 구속, 고문, 처형된 성직자는 주교 5명, 사제 82명(그 중 5명이 김수환 추기경 동창생 신부들)과 수녀 35명, 대신학생들과 수사들 29명 등. 우리나라의 어떤 박해 때도 150여명의 성직자와 수도자들이 1, 2년 동안에 이처럼 150여명이 처형된 적은 없었다. 그런데 아직도 처형된 대부분 성직자들의 무덤조차 모르고 있다.<유홍렬 교수 저, 한국천주교회사 下卷 1962. 참조, Catholic Encycloped. 1965. etc.,,,참조.>. Msgr. Byon.
 
********************************************* 
 
8월 15일은 성모 마리아 승천대축일이며, 대한민국 건국기념일이고, 겨레의 꽃 무궁화기념일입니다. 따라서 8월은 [겨레의 꽃 무궁화 사랑의 달]입니다. 천진암 성지에서는 8월 15일 낮 12시에 기념 경축미사를 드립니다.
 
-韓民族의 民族花이며 國花-
 
1997년 4월 5일 식목일에, 한민족100년계획천진암대성당건립위원회의 강영훈 위원장을 비롯한 내빈과 신도들은 한국천주교회 발상지 천진암 성지 내 성지입구의 3천여 평의 부지에 무궁화 동산을 조성하고 1만여 주 무궁화를 식목하였다.
 
[무궁화(無窮花)]라는 이름은 일본이 조선을 점령할 당시 독립 운동가들에 의하여 불려 지내던, 100여 년의 역사를 가진 이름으로써, 그 전에 는 근화(槿花), 무게 나무, 무강꽃, 등으로 불리었다. 한반도를 중심으로 극동아시아에 살던 우리 조상들(東夷族)이 무궁화를 가꾸고 있었다는 가장 오래 된 기록은 기원전 8세기 전후의 춘추전국시대에 저술된 <산해경 山海經>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책은 동진(東晋)때 곽박이라는 사람이 그 때까지 전해 내려오는 기록을 종합 정리한 것으로, “군자(君子)의 나라에 훈화초(薰花草)가 있는데,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 진다.”고 하였다. 군자국은 우리나라를 가리키는 것이며, 훈화초는 무궁화의 중국어 옛 이름이다.
 
또한 신라 효공왕이 문장가 최치원에게 작성시켜 당나라에 보낸 신라 국서(新羅國書)에서, 자기네 나라 신라를 가리켜, ‘근화향(槿花鄕:무궁화의고향나라)이라고 하면서, 근화향은 겸양하고 자중하지만…’ 하고 기록하고 있어, 신라를 일컬어 근화향 곧 무궁화 고향나라’라고 하고 있다.
 
조선 세종 임금 때 강희안이 저술한 한국 최고의 화목에 관한 책,<양화소록 養花小錄>에, “우리나라에는 단군이 개국할 때부터 이미 무궁화를 가꾸었기 때문에 중국에서 우리나라를 일컫되 반드시 ‘무궁화의 나라(槿域)’라 말하였다.”는 기록도 있듯이, 무궁화는 우리겨레가 3,4천년간 가꾸어온 역사를 가진 셈이다.
 
일제의 <왜기 倭記>에, “무궁화는 조선을 대표하는 꽃으로서…. 고려시대에는 전 국민으로부터 열광적인 사랑을 받았으며, 문학적으로 항상 진중한 대우를 받았다. 일본의 벚꽃, 영국의 장미와 같이, 국화로 되어 있다가 조선조에 들어와 왕실화가 이화(李花)로 정해져서 무궁화는 점차로 세력을 잃고 조선민족으로부터 소원해졌던 것인데, 20세기 서구문명이 조선에 들어오자 유지들은 민족 사상의 고취와 국민정신의 통일 진작을 위하여 붓과 말로, 천자만홍의 모든 꽃은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로되, 무궁화는 여름과 가을에 걸쳐 100일간을 계속해서 핀다고 하 여, 그 고결함과 위인적 자용(偉人的 姿容)을 찬미하였다. 따라서 무궁화 강산 운운은 자존된 조선의 별칭이다.”라는 기록과 같이, 우리 민족과 무궁화의 관계는 천륜적이라 하겠다.
 
또한 “조선에도 개화풍이 불어오게 되고, 서양인의 출입이 빈번해지자 당시의 선각자 윤치호 등의 발의로 洋樂隊 결성을 비롯하여, 애국가를 창작할 때에 애국가의 후렴에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이라는 구절이 들어가면서 무궁화는 조선의 국화요, 겨레의 꽃이 되었다. 특히, 안창호 등이 맹렬히 민족정신을 고취할 때에 연단에 설 때마다, 가두에서 부르짖을 때마다, 주먹으로 책상을 치고, 발을 구르면서 무궁화 동산을 절규하자, 여기에 자극을 받은 민중은 귀에 젖고 입에 익어서 무궁화를 인식하고 더욱 사랑하게 되었다.”(1935. 10. 21. 동아일보)라는 당시의 보도는 실로 중요한 기록이다.
 
그러므로, 결국 무궁화는 단순이 나라의 꽃이라기보다는, “겨레의 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천진암성지에서는 이미 30여년 전부터 무궁화를 심기 시작하였다. 1979년에 3백 주를 심었고, 1980년과 1981년에도 한국천주교회 발상지 천진암성지 위원회 초대위원장 이숭녕 박사와 함께 신도들이 2,000여 주를 심었으며, 1982년도에는 3,000여 주, 그리고 최근에는 30,000여 주를 더 심었고, 한민족100년계획천진암대성당 주변의 토목공사가 끝나면 모두 30여 만 주의 무궁화를 심어 가꿀 예정이다. 현재는 모두 약 3만5천 주 가량 된다.
 
그런데 무궁화에 대한 사랑은 사실 한국 천주교 성직자들의 문학작품과 신자들의 전례성가 속에 이미 들어와 있다. 이미 반세기 전에 고 최민순 신부님께서 지으신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 노래를 보면,
 
서라벌 옛 터전에 연꽃이 이울어라.
선비  네 흰옷자락 어둠에 짙어갈 제,
한 떨기 무궁화로 피어난 님이시여 !
 
라고 함으로써, 김대건 신부님을 ‘한떨기 무궁화’에 비유하였고,
 
장하다 복자여, 주님의 용사여….
무궁화 머리마다 영롱한 복자시여….
 
하며, 무궁화를 한국천주교회의 공식 전례성가에 받아들였다.  
또한 지난 1984년 로마 교황성하께서 한국에 오시어 거행하신 103위 諡聖 당시 주교회의 시성추진부에서는 영문판으로 발행한 103위 성인전에 바친 꽃에도 우리겨레의 꽃인 무궁화를 전면 천연색으로 넣음으로써, 신앙 속에서의 무궁화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였다.
 
이렇게 겨레의 꽃인 무궁화에 대한 사랑은 신자들의 성가 속에서, 103위 성인전 속에서, 그리고 한국천주교회 발상지 천진암 성지에서, 성장하는 무궁화동산으로 자리 잡아 나가고 있다. 더욱이 1999년 조용히 조그마하게 개최되는 어린이들 중심의 무궁화축제를 시작으로 하여 100년 계획으로 계속될 것이다.
 
매년 우리나라 곳곳에서는 일본의 국화, 벚꽃 축제가 성대히 개최되고 있는데 비하여, 나라 꽃이며 겨레의 꽃인 무궁화 축제는 국민들이 무관심하고, 소홀히 하고 있음이 현실이다. 우리는 이를 부끄러워하면서, 1999년부터는 비록 촌스럽고 쑥스럽다고 흉잡히더라도 어린이 무궁화 축제도 시작하였다. 무궁화 축제는 오락과 유흥, 사치와 소비와 향락을 위한 상업적인 성격을 배제한 축제로서, 사상과 철학이 있는 축제이고, 민족정신을 강화시키는, 역사의 숨결이며, 우리 민족의 역사정신을 되살리는 축제가 될 것이다. 무궁화에 대한 노래와 시가 너무나 빈약한 지금 새로 짓는 무궁화 시문으로 작곡도 시도할 것이고, 앞으로는 무궁화 장학금도 시도하면서 다양한 행사와 계획을 마련하여, 천주교회의 토착화에도 보탬이 되게 하고자 한다.
 
시편을 비롯한 성서를 보면 이스라엘의 민족정신이 신앙과 얼마나 잘 융합되어 있는지 우리는 잘 알 수 있다. 신앙심과 애국심, 민족애는 결코 분리되는 것(separatio)이 아니라 구분될(distinctio) 뿐이다.애국심은 신앙심으로 승화되고, 신앙심은 이웃사랑이라는 면에서 애국심으로, 민족애로 발전 강화되는 것이다. 천진암 성지는 사람들이 무궁화가 심겨진 진입로를 따라 성역으로 걸어 오르면서, 애국심을 키우고, 그 키워진 애국심은 성지에 서려 있는 선조들의 신앙과 순교정신에 힘입어 더욱 강한 실천 신앙으로 결실되고, 그 신앙심은 다시 성지 주변의 무궁화를 통하여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서 애국심과 민족정신으로 꽃피게 될 것이다.
 
이제 천진암 성지는 애국심과 신앙심을 하나로 묶어서 자손만대에 전승하는 그러한 성지로 성장할 것이다. 그리하여 한국 천주교회는 애국심과 신앙심을 하나로 합하여 거룩한 새 민족문화를 이루도록 해야 하며, 따라서 민족정신과 천주교 신앙이 상호 결코 상반되지 않고, 상호보완적인 작용을 하면서, 국가와 민족의 성장과 결실로, 국가와 민족의 무궁한 발전에 천주교회도 참여하며 기여해야 할 것이다.
 
천주교회를 민족정신의 토양 위에서 키우고, 우리의 민족문화는 전 세계적인 천주교 신앙을 받아 하나가 되어, 온 겨레가 천주와 더욱 밀접히 결합하는 새 역사가 이 천진암 성지에서 더욱 더 튼튼히 뿌리내리게 될 것이다. 온 겨레가 무궁화를 함께 가꾸던 古朝鮮, 統一新羅, 高麗, 朝鮮 시대에는 통일된 국가와 민족성을 지켰으니, 3천년 이상 오랜 역사를 통하여, 우리 선조들이 함께 가꾸던 무궁화를 南北韓모든 동포들이 함께 사랑하고, 가꾸고, 지키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祖國統一을 위하여! <1999. 8. 29. 한국천주교회 발상지 천진암 성지 변기영 신부>

Writer : Msgr. Byon   Date. 2014-08-11 00:07
다음글 : 교황님,한국방문 위해 로마 출발 직전, 성모 대성당을 참배하시고,,,
이전글 : 말이자 글이오, 글이자 마음인데,-서창제 교수 론 소개
우리나라천주교회창립사
천진암성지 소식지(2019년 1월호)
ebook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