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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림과 새소식
  1. 알림과 새소식
聖 金大建 神父 略史 를 더듬어보며,

聖 金大建 神父 略史를 더듬어보며,

김대건 신부님의 25년 짧은 일생을 보면 실로 감격하지 않을 수 없다.

사제로서는 13개월뿐, 그나마 형무소 한곳에서 가장 여러 달을 지내었다.

대신학생으로서도 한곳에서 충분히 신학을 공부할 겨를이 없었다. 계속되는 여행 중에 머무는 사제관의 선교사들에게 배워야 했다.

솔뫼에서 태어난 후, 소년시절부터 용인 한덕골로, 굴암으로, 은이로, 서울로, 구산으로, 마카오로, 필립핀으로, 대만으로, 마카오로,북경으로,의주로, 팔가자로, 경흥으로, 서울로, 상해로, 제주도로, 이리 강경포로, 서울로, 은이로, 연평도로, 서울로, 새남터로,,,!!!

순교하신 후에도, 유해가 새남터에서 미리내로, 용산 신학교 성당으로, 용산 성직자 묘지로, 밀양 성당으로, 서울 백동 소신학교 성당으로, 혜화동 대신학교 성당으로, 시성식 때는 유해 일부가 로마 성 베드로 대성당으로, 다시 한국으로, 미리내로,,,!!!

순교는 순간에 피는 신앙의 제사가 아니라, 뿌리와 줄기와 잎이 자라면서 피우는 꽃과 열매처럼,이미 무혈의 순교생활이 선행되고 전제되어 완성되는 제사다.

우리는 김대건 신부님의 사제로서 13개월 못지 않게, 사제가 되기 전의 24년간의 신앙생활,무혈의 희생으로 충만한 순교생활에 눈을 멈추어 바라보며 존경과 찬미를 드리자.

여기 소개하는 [聖 金大建 神父 略史]는 故 김구정 옹이 저술한 "聖雄 金大建 神父" 책의 말미에서 전재한 것으로 그래도 거의 정확을 기하고 있으며, 이를 저술하기 위하여 김구정 옹의 노고와 희생에 머리를 숙여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다. Msgr.By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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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1년 8월 20일 충청도 내포(內浦)지방 솔뫼(松山里)에서 김해 김씨 안경 공파(安敬公派)의 부친 김제준(金濟俊 이냐시오), 모친 고 우르술라(長與 高氏)에서 탄생. 아명 재복(再福, 族譜名 芝植, 冠名 혹 雅號 大建)
.
1836년 15세 여름 경기 용인(龍仁) 은이(隱里) 공소 한덕골(寒德洞)로 피난하여 漢文 수학. 불란서인 聖 모방 신부(羅 모방)에게서 영세, 교명 안드레아.
7월 11일 丁夏祥 성인의 소개와 안내로 예비 신학생으로 간택. 서울 나신부 자택에서 수학(그해 봄에 선발된 최과출 프란치스꼬와 최양업(崔良業) 토마와 동문 수학.
12월 2일 3인 함께 신학생으로서 서약(誓約).
12월 9일 3인과 중국인 유신부(劉 빠치피꼬), 정신부(샤스땅)의 영접군 교우들과함께 丁夏祥 성인의 인솔과 안내로 서울 출발.
12월 28일,중국 변문 샤스땅 정신부 거처에 도착.

1837년 6월 7일 마카오 도착(서울 출발 육로 도보 7개월 후).빠리외방전교회 동양 경리부 깔레리 신부 문하에서 수학 시작. 8월경 마카오 민란으로 마닐라로 피난.겨울에 마카오로 귀환.

1838년 11월 26일, 최과출 프란치스꼬를 사별(死別).

1839년 4월 6일 마카오에서 또 민란. 깔레리 신부, 드플레스 신부(선생 신부)와 함께 마닐라로 피난, 동 9일 도착. 동 5월 7일 마닐라에서 30리 되는 폴롬베이 도미니꼬회 별장에서 수학. 동 8월에 부모 편지 접수.
11월경 마카오로 귀환.

1840년 철학 공부(조선 4대 주교가 될 베르뇌(安) 신부와 존선에 나와 전교할 매스뜨르 신부한테 배움).

1841년 철학 공부 계속(베르뇌 신부 뚱낑으로 출발하므로, 매스뜨르 신부에게서 수학).

1842년 2월 15일 마카오를 아주 떠남(6개월 간 불란서 극동함대 제독 세실씨의 통역관으로 임시활약).
2월 28일 마닐라 도착.
3월 2일경 마닐라 출발, 대만(臺灣)으로 향함.
6월 27일 주산도 (舟山島) 도착. 동 7월 초순 오송(吳淞)도착(최 토마는 동 4월 25일 마카오 출발, 8월 23일 오송에 역시 도착).
8월 29일 남경(南京)조약 체결에 제3국인으로서 입회 참석.
9월 11일 오송에 도착, 황세흥(黃世興) 집에 유숙.
9월 16일 샹하이 (上海) 베시 주교 댁에 유숙.
10월 10일 샹하이 출발.
10월 25일 따챵허(大裝河)에 도착. 해변에서, 중국 관헌으로부터 서양신부를 구출(救出)함.
10월 26일 요동 서남단(西南端) 해안에서 6,70리 빠이갸덴(白家店)에 도착.
12월 23일 조선 안내원들 만나러 책문(柵門, 중국 변문)으로 출발. 동 26일에 변문에서 30리 못미쳐 도중에서, 조선 안내원 김 프란치스꼬 상봉, 조 선 교회 소식 상세히 들음. 동 27일 변문에 도착.
12월 29일 변문 출발.1백 30리 걸어 의주(義州)를 바라봄. 소장사들 틈에 끼어 입국(入國). 밤새도록 약 백리 보행. 동 30일 주막에서 축출당함. 중도의위험을 각오, 의주로 돌아옴. 동 31일 압록강을 다시 건넘.

1843년 1월 1일 다시 약 1백 30리 도보로 변문 도착. 동 2일에 변문 출발.동 6일에 빠이갸덴(白家店) 도착.
3월과 9월 변문을 2회 왕복.
12월 31일 개츄(蓋州)에서 고주교 성성식 참례.

1844년 1월 24일 고주교와 봉천(奉川) 동행. 조선 교우 상봉. 서양인 국경 잠입 불능 소식 들음. 고주교와 몽고 빠갸즈(八家子)로 출발.
2월 4일 김대건 신부 혼자 훈춘, 조선 경원(慶源)으로 출발(왕복 약 4천리).동 3월8일에 훈춘 도착.경원에서 조선 교우 상봉. 소간사(所看事) 실패.
4월 빠갸즈(八家子)로 와서 매스뜨르 신부한테 신학(神學)공부.
12월 15일(이전) 6품(부제품) 받음(사제품은 연령 미달로 연기됨).

1845년 1월 1일 고주교와 함께 중국 변문 도착. 조선 교우 상봉. 김대건 부제만 조선으로 출발. 무사히 국경 돌파.
1월 15일경 서울에 도착, 돌우물(石?里)에 잠거.
2월 중병에 걸려 15일 간 위중 상태로 앓음.
3월 국내에서 사제 지망생 예비신학생 2인에게 수업.
4월 30일 마포에서 샹하이로 목선으로 11명 교우와 동행 출항, 1개월간 구사일생 항해.
5월 28일 오성(吳淞)에 도착. 중국 관헌의 위협을 영국인 보호로 면함.
6월 4일 샹하이(上海)도착, 배 수선. 고주교를 고대(苦待), 약 3개월 체류.
8월 17일 샹하이서 30리 김가향(金家港) 신학교 성당에서 고주교께 사제승품.
8월 24일 샹하이에서 약 30리 되는 완땅(萬堂) 성당에서 첫 미사거행(다불뤼 안신부가 첫미사 보조함).
8월 31일 샹하이 출발(고주교, 안신부 동행) 오송에 와서 17일 간 풍랑으로 체류. 동 9월 18일에 다시 출범. 동 21일부터 10일 간 풍랑과 싸움.
9월 28일 제주도(濟州道)에 표류착륙(漂着).
10월 12일 강경(江景) 황산포(黃山浦)에 하륙(승선한지 42일 만, 서울을 떠난지 7개월만에 귀국임).
11월 12일 서울, 은이 공소에 귀향,모친상봉).

1846년 4월 8일 은이에서 최후 미사. 서울로 출발.
5월 14일 황해도 앞바다에 중국 어선 교섭 차, 마포(麻浦)에서 출항.
5월 25일 연평도 (延坪島) 도착.
5월 27,8일 등산진(登山鎭) 도착(소강, 터진목, 소청, 대청, 백령도를 경유).
5월 31일 장연(長淵) 목동(牧洞)에서 중국배에 편지 1봉 부침.
6월 1일 등산진으로 돌아옴.
6월 5일 등산 첨사에게 체포됨(일장 설교, 형구를 자기 손으로 목에 댐).
6월 9일경 해주 감영(海州監營)으로 압송됨.
6월 21일경 서울로 압송(해주에서 서울까지 3백 75리 가량).
6월 22일 첫 공초(供招).
6월 26일 2회 공초.
6월 27일 압수된 편지 일체 압래.
6월 30일 3회 공초.
7월 1일 4회 공초.
7월 16일 5회 공초.
7월 19일 6회 공초.
7월 30일 신부들과 최 토마에게 최후 편지를 씀.
8월 24일 불란서 제독의 편지 서울에 도착.
8월 26일 고주교께 최후 상서.
8월 29일 교우들에게 최후 유서.
9월 5일 불란서 편지로 인해 중희당(重熙堂)에서 어전 회의 개최.
9월 15일 김신부 최종 판결 문제로 희정전(熙政殿)에서 어전 회의개최.사형선고. 좌우포장 파면.
9월 16일 한강 새남터에서 참수순교. 그 현장에 가매장.
10월 26일 서울서 150리 거리 안성 미리내(美山里)로 교우들이 이장(移葬).

1857년 9월 23일 가경자(可敬者)로 반포됨.

1901년 5월 18일 묘지 발굴, 용산 신학교 성당으로 이장(移葬), 안치.

1925년 7월 5일 로마에서 시복식(諡福式).

1949년 11월 15일 한국교회 성직자 대주보로 확정. 또한 7월 5일을 김대건 신부의 축일로 정함(로마 교황청).

1950년 6월 25일 6.25 동란에 용산 성직자 묘지에 이장. 9.28 수복시에 경남 밀양(密陽) 성당으로 임시 이장,

1951년 서울 수복 후에 서울 혜화동 (일명 백동) 소신학교 성당으로 이장함.

1960년 7월 5일 혜화동 대신학교 성당에 이장 안치.

(*여기 실린 연월일은 주로 양력으로 하였고, 또한 전에 여러 가지로 김신부 약력의 연월 일이 일정하지 않아, 여러 문헌을 참고하여 기재함* 저자 김구정).

9월16일은 김대건신부님 순교 161주년 ! 천진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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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김대건 신부님은 1846년 9월 16일, 신부가 된지 만 13개월만에 25세로 순교하였다. 김대건 신부님의 일생을 간결하게 주요 사적 중심으로 살펴보자.

1821년 충남 솔뫼에서 출생하여,

1827년 경기 용인 한덕골(寒德洞,일명,성애골)로 부모님들과함께 피난하였고,굴암, 등 주변 산골 마을로 이사다녔으며,

1836년 양지 은이(隱里) 공소에서 영세하고,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그해 12월 9일 서울을 출발하여 마카오로 떠났다.정하상 회장이 신의주 국경까지 데리고 갔다.
1837년 6월 7일 만 6개월만에 마카오에 도착하였다. 약 2만리 길을 6개월동안 걸어서 갔다. 김대건 15세, 최양업15세, 최과출 14세였다.
1838년에 최과출이 8개월만에 병으로 사망하였다.

1845년 8월 17일, 사제가 된 후 1년 후, 즉

1846년 9월 16일에 새남터에서 칼에 목이 잘리어 순교하였다.대구교구의 김구정 옹이 집필한 [성웅 김대건 신부 전]이 아직까지는 가장 잘된 책으로 보인다.

천진암 성지에서는 이날 12시에 기념미사와 강론을 듣는다


Writer : 천진암   Date. 2007-09-16 2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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