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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꽃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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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삶의 꽃자리


사순 제 2주간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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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스라엘 예루살렘 비아 돌로로사 제 14처 : 예수님께서 묻히신 첫번째방인 천사의 방>

"그가 아직도 멀리 떨어져 있을 때에 아버지가 그를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달려가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루카 15, 20)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탕자의 비유 말씀을 들려주십니다. 이 복음의 말씀은 누구나 잘 알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할 말이 없습니다. 하지만 몇 가지만 함께 생각해 봅니다.

아버지를 향한 작은아들의 무례한 태도입니다.

아버지를 향한 작은아들의 무례한 태도는 하느님 아버지를 무시하고 자기가 원하는 것만을 추구하는 것은 아담 이래 지금까지 변함없는 인간의 모습인 것입니다. 사랑으로 창조해 주시고 돌보아 주신 하느님을 반역하면서 스스로 신이 되고 싶어 선과 악을 알게 하는 과일을 따먹었고 하느님이 계시는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아담이 바로 최초의 탕자일 것입니다. 아담으로부터 전해진 인간의 습성은 하느님이 아닌 다른 것에 더 마음을 두면서 우상숭배를 하려합니다. 보이지 않는 하느님보다는 구체적으로 만질 수 있고, 붙잡을 수 있고, 소유할 수 있는 대상, 즉 재물, 성공, 권력, 명예 등과 같은 것들을 우상을 우선적으로 생각하며 하느님 대신 숭배합니다.

그런 작은 아들이 제정신이 들었습니다.

제정신이 들다.”란 말은 회심을 가리킵니다. 시실 아들이 아버지를 떠나서 살아가는 동안은 제정신으로 사는 것도, 자기 자신이 되어 사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인간이 하느님을 떠난다는 것은 곧 자기 자신을 떠난다는 것입니다. 그런 아들이 제정신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몸을 일으켜 아버지의 집으로 향한 것입니다. 이것은 회심의 대표적인 모습입니다. 회심이란 그래서 아버지의 마음과 사랑을 생각하고 몸을 일으켜 아버지를 향해 다시 걸어가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먼저 알아봅니다.

자비의 눈은 회심의 눈보다 빠릅니다. 한문으로 ()”자는 풀이해 보면 나무 위에 서서 바라보다.”라는 뜻입니다. 집을 나간 자녀가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부모님은 그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그들이 떠나간 길을 하염없이 바라보십니다. 그것도 돌아오는 자녀를 잘 알아보고 멀리 보기 위해서 나무 위에 앉지도 않고 서서 바라본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녀를 기다린 아버지는 죄인인 우리가 돌아가기만 하면 마치 우리가 아무 죄도 짓지 않은 것처럼 당신 사랑을 쏟아 부어 주십니다. 목욕이 아니라 옷을 입혀준다는 표현은 작은아들의 신분을 인정해주는 것입니다. 우리 죄인이 하느님을 만나는 순간에 이루어지는 첫 번째 일은 하느님께서 우리의 죄스러운 흔적들을 말끔히 씻어준다는 것이고, 자녀의 신분을 다시 인정해 주시는 것이다.

큰 아들이 처사를 봅니다.

큰아들은 아버지의 처사를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하느님의 행동양식은 모자이크와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모자이크는 밖에서 볼 때에 볼품없지만 안에서 볼 때에는 찬란한 아름다움과 풍요로운 의미를 보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사랑과 정의도 하느님 마음으로 바라보기 전에는 종종 이해할 수 없는 법입니다.

본당에서 사목을 하다보면저런 사람이 성당에 다니는 한, 성당이 저런 사람을 환영하는 한 나는 성당에 다닐 수 없어.”라고 하면서 공동체 밖에 서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하느님의 사랑을 스스로 거부한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큰 아들은 아버지의 사랑을 오해하고 거부하였습니다.

그래서 말합니다. “아버지를 위해서 종이나... 명령을 어긴 일이 없었습니다.” 큰아들은 그동안 아버지를 사랑하는 아들로서가 아니라 주인을 섬기는 종의 자세로 살아왔던 것입니다. 아버지는 그를 사랑스런 아들로 대하는데 그는 아버지를 주인처럼 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자녀만이 가지고 느낄 수 있는 아버지에 대한 애정도, 아들로써의 자부심도, 삶의 기쁨도 없을 수 밖에 없는 처지가 된 것입니다. 그에게 있다면 부담스런 의무감만 있을 뿐이고, 의무감만 있다 보니 아버지가 하시는 말씀은 모두 명령으로 다가올 뿐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비유는 큰아들이 집으로 들어갔는지를 이야기하지 않은 채 막을 내립니다. 과연 아버지의 사랑이 큰아들을 설득할 수 있었는지? 아니면 잔치가 끝날 때까지 밖에 있었는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오로지 당시 예수님의 비유를 듣고 있던 바리사이들과 큰아들의 처지에 있는 우리들이 결정해야 할 것입니다.

사순 시기는 복음의 작은 아들처럼 자신의 과오를 솔직히 인정하고 과거의 삶으로부터 떠나 몸을 일으켜 우리를 기다리시는 하느님 아버지께 돌아가는 시기입니다. 큰 아들이 가졌던 종의 모습이 아닌 진정한 자녀의 모습을 찾아가는 시기입니다. 이런 의미를 깨닫고 지내는 사순절이 되기를 희망해 봅니다.


Writer : 송병선 신부   Date. 2017-03-19 2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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