天眞菴聖地

바로가기메뉴
주메뉴바로가기
서브메뉴바로가기

유틸메뉴


주메뉴


서브메뉴

삶의 꽃자리

  • 삶의 꽃자리
성금 봉헌 안내시복시성 추진성지안내 조감도

본문내용

글자 작게 하기글자 크게 하기
삶의 꽃자리
  1. 삶의 꽃자리


사순제 2주간 수요일

본문이미지


      <이스라엘 예루살렘 비아 돌로로사 제 13처 : 시신을 내리우심.(예수님 시신 염습한 장소)>

"많은 이들의 몸 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마태오 20, 28)

사람이 가진 욕심의 끝은 어디일까요? '여러분은 얼마나 큰 욕심을 가졌습니까?'하고 질문을 받는다면, 대부분 '뭐 욕심이랄 것 있습니까? 누구나 다 갖고 있는 만큼 갖고 있지요. 이 정도 욕심 갖지 않고 살 수 있나요? 적당히 봐 주시죠. '하고 응답하거나, 많은 욕심을 갖고 살지 않는다고 할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살펴볼 수 있는 것은 욕심에 대한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채우려하고 무엇인가를 이루려고 한다는 것은 참 좋은 것입니다. 그것이 분수에 맞으면 달리 말할 것이고, 분수에 넘치면 욕심이라고 한다는 차이 빼고는 별 차이 없는 것이 사람이 가진 그런 마음에 대한 평가입니다.

우리는 오래도록 살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도 욕심일 수 있고, 욕심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욕심이라는 말로 쓸 때는 그다지 좋은 감정으로 사용하는 말은 아닙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의 말씀이 그것을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내가 특별한 일을 하고자 하는데, 저 자식은 항상 눈에 거슬린단 말이야, 그래서 아예 없애버렸으면 속 시원하겠어.'라는 것이 첫 번째 독서에 나오는 인간의 욕심이고, '내 배 아파서 난 자식이니, 똑같은 일을 하더라고 좀 더 영광스러운 자리, 좀 더 영예로운 자리에 앉아서 다른 사람들의 칭송을 받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것이 우리의 어머니들이 갖는 지극히 당연한 욕심입니다. 적은 노력을 들이고 남보다 더 나은 대우를 받는다는 것은 분명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도 항상 좋은 것만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욕심이 왜 있을까요?라고 질문을 할 수는 있지만, 그 해답은 쉽지 않습니다. 아마도, 자기 이름 몇 글자 남기려고 하는 마음이 강해서 그럴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름 몇 글자 남기면, 세상이 어떻게 달라질까요? 모르긴 해도 아무 것도 달라지는 것은 없을 것입니다. 이 세상에 살아 있으면서 칭송을 받는 것은 그래도 좀 나을텐데, 죽고 나서 이름 몇 글자 남기고, 길 가던 사람이 나의 무덤 앞에 서서 '위대한 사람'이었다고 기억해 준다고 해서 뭐가 대단하겠습니까? 그래도 사람은 자기 이름을 남기려고 합니다. 아마도 이것은 생명이 만들어 졌을 때부터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신 특성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이런 특성이 있기에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찾으려하고, 내 주변에 있지는 않지만, 나보다 못한 사람을 위해서 특별한 행동을 하려고 할 것입니다.

사람들에게서 죽음의 길로 내몰리던 슬픈 예언자, 예레미야는 자신에게 닥쳐오는 어려움을 알고도 보통사람들과는 달리 행동합니다. 그가 사람들의 반대를 받는 길로 나섰던 것은 단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겠다는 일 때문에 그리된 것이니, 그가 돌아설 수 있는 길은 그것이 유일한 방법이었는지도 모릅니다.

복음에는 두 아들을 예수님의 제자로 보낸 어머니의 바람이 나옵니다. 그가 가진 바람도 지극히 인간적인 것입니다. 이런 바람에 대하여 예수님은 질책하시지 않으십니다. 질책은 오히려 제자들이 합니다. 다만 예수님께서는 그런 영광에 참여하기 위한 단서조항으로 삶의 고난을 이겨낼 수 있는가를 물으십니다.

로마인의 동전을 보면 황소 그림이 새겨져 있는데, 그 황소는 제단과 쟁기를 마주 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말마디가 새겨져 있다고 합니다.

두 가지 일을 준비하고 있으라.“

즉 황소는 제단에 희생 제물이 되는 숭고한 순간이 있는가 하면, 논과 밭에서 오랜 세월 동안 경작을 해야 하듯이, 이처럼 사람도 두 가지 사명을 위해서 준비하고 있으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잔이 또한 그렇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 우리가 마셔야 할 고난의 잔으로서, 짧고 예리하고 괴로운 순교자의 고난의 삶을 의미하는가 하면, 신앙으로 인하여 매일 생활 속에서 희생과 괴로움의 나날을 보내야 하고 실망과 역경의 눈물을 흘리면서도 극복해 나가야 하는 삶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세상의 삶을 통하여 영광으로 나아간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도전해 볼만한 묘미는 있는 투자입니다. 그리고 그 투자의 효과를 볼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 따라, '목숨을 바쳐 몸값을 치룰 때, 우리에게 다가 올 선물'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이 없이는 부활의 영광이 없듯이, 섬김과 나눔과 희생과 봉사의 삶이 없이는 하느님 사랑의 의미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참사랑은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서라도 다른 사람의 구원을 위하여 희생하고 봉사하는 사랑입니다.

예수님과 이웃을 위해 나를 내어주는 숭고한 봉헌만이 한 줄기의 빛으로 세상을 밝히는 등불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을 봉헌하며 누구의 구원을 위하여 나의 몸값을 바칠 것인가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삶을 통해서 올바른 지혜를 알아들을 수 있도록 청했으면 합니다.


Writer : 송병선 신부   Date. 2017-03-15 09:26
다음글 : 사순 제 2주간 목요일
이전글 : 사순 제 2주간 화요일
우리나라천주교회창립사
천진암성지 소식지(2019년 1월호)
ebook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