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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꽃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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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꽃자리
  1. 삶의 꽃자리


연중 제 16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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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스라엘 베타니아에 있는 성 라자로 성당 내 벽화 - 예수님과 마르타, 마리아>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루카 10, 41)

사람은 누구나 살아가면서 나름대로의 기준을 가지고 살아갑니. 그리고 이 기준을 잘 활용하여 여러 단계를 거치면서 성숙에로 나아갑니다. 한 단계에서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 위해서는 자기를 깨는 아픔을 겪어야 합니다. 이 고통을 이겨내지 못하면 더 이상 전진하지 못하고 퇴보하게 됩니다.

언제인가 지나던 길에 어느 골목길에서 서로 싸우는 소리가 들려, 무슨 일인가 하고 보니 집 앞의 주차 문제를 가지고 싸우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집 앞에 주차선이 그려져 있지 않은데, 그 곳에 차를 세운 집주인과 스티커를 붙이려는 주차단속요원과의 싸움이었습니다. "내 집 앞에 차를 왜 못 세우냐? 벌써 몇 번째냐?", "분명히 주차선이 없는 곳인데 무슨 말이냐?"라는 이 싸움은 한참 계속되었습니다. 서로 자신들이 세운 기준만을 생각하고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지 않으려고 하니 당연히 싸움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었습니다 

이 일을 보면서 문득 이러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나름대로의 수많은 자기 기준을 세우고 사는데 문제는 이 기준이라는 것이 오히려 자신이 만드는 다른 사람과 충돌하게 하는 또 다른 커다란 벽이 아닌지? 더구나 신앙인으로서 하느님과 나와의 관계에 내가 만든 기준을 가지고 하느님을 대하려고 하는지도 반성을 해봅니다. 결국 내 가 만든 기준만을 가지고 하느님을 대한다면 내 안에 살아 계신 하느님이 아니라 내가 만든, 내 입맛에 맞춘 하느님을 섬기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순간의 달콤함이 있겠지만 분명히 잘못된 신앙임을 우리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습니. 그러나 잘못된 것임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나만의 기준을 고집하여 많은 실수를 저지르고는 합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독서와 복음은 전통적인 유다인들의 손님접대에 관한 기준들입니다. 1독서에서 아브라함은 지나가는 나그네를 대접합니다. 새롭게 빵을 굽고 송아지를 잡아 대접합니다. 이런 손님 접대 행위를 통하여 아브라함은 아들을 얻게 될 것이라는 축복의 약속을 받게 죕니다.

복음에서는 마르타와 마리아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길에 예수님은 종종 길목인 베타니아의 라자로, 마르타, 마리아가 사는 집에 들리시고는 하였습니다. 자신의 삶에 소중한 분이 오셨기에 마르타의 마음은 분주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좋아하시는 음식을 대접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래서 마르타는 분주하게 움직이면서 예수님의 시중을 듭니다. 하지만 동생 마리아는 마르타와는 반대로 예수님 발치에 앉아서 그저 예수님 말씀만을 듣고 있었습니다. 가뜩이나 일손이 부족한데 자기 혼자 예수님 곁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는 마리아를 마르타가 보는 순간 마르타는 마리아와 자신을 비교합니다. 열심히 일하고 있는 자신과 예수님 곁에 가만히 앉아있는 마리아를 말입니다. 그리고는 마리아에 대한 미움과 질투가 생겨나기 시작했고 이렇게 마리아를 판단했을 것입니다. "자기만 예수님 곁에 있고 싶나? 나도 예수님 곁에 있고 싶어, 하지만 우리가 아니면 누가 예수님을 챙겨? 나는 이렇게 고생하는데 이 언니를 도울 생각은 안하고 뭐하는거야."

그래서 예수님께 "주님, 제 동생이 저 혼자 시중들게 내버려 두는데도 보고만 계십니까? 저를 도우라고 동생에게 일러 주십시오."라고 말한다. 마르타는 자신이 생각하는 것만이 중요하기에 다른 사람이 자기의 생각과 기준대로 움직여주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의 모습을 고쳐주시기 위하여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나!”라고 말씀하시며 마리아의 행동과 선택을 존중해 주기를 바라십니다.

마르타가 정한 기준은 즉 예수님이, 아니 누군가가 내 집에 오셨으면 당연히 접대를 하기 위해 신경을 써야한다는 것이었는데 동생인 마리아가 자신을 도와주기는커녕 예수님 말씀을 듣기에 바쁜 것을 보고 역정을 냅니다. 그 모습을 보시는 예수님은 동생인 마리아가 좋은 몫을 선택했다고 말씀하시면서 마르타가 생각한 것이 잘못된 것임을 일깨워 주시는 것입니다. 뒷이야기는 나오지 않지만 마르타가 예수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면 자신이 스스로 만든 틀에 자신을 가둔 잘못된 신앙인이 되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들, 취미가 다른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다양한 모습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서 아름다운 사회를 이루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 획일적인 모습을 가진 사람들만을 원한다면 이 사회는 죽은 사회가 될 것입니다. 명백히 잘못되었음에도 자신의 의견을 고치지 않는다면 일의 삶은 충돌과 마찰로 인하여 피폐해질 것이고, 선장이 끝내 배의 진로를 바꾸지 않았다면 배는 등대와 부딪혀 좌초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자신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면 고칠 수 있는 용기 또한 중요한 것입니다.

선한 행동을 할 때, 어떤 사심이 들어가면 그 선한 행동은 사라진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지금 내가 행하고 있는 것이 진실로 선한 것이라면, 또한 예수님 보시기에도 좋아하실 것이라 생각한다면 어떤 사심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독서의 아브라함은 아무런 사심이 없이 단순한 마음으로 나그네를 대접하며 축복을 얻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마르타는 그렇지 못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내가 사심을 가지고 상대방을 판단하고, 그 사람과 나를 비교하면, 그래서 단죄한다면, 그 순간 그 상대방의 중요한 몫을 빼앗는 악행을 저지르는 것이 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내가 만든 기준만을 가지고 예수님을 섬기려고 하는 신앙의 모습인지? 아니면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예수님의 뜻에 맞는 기준을 살려고 노력하는 신앙의 모습인지? 한번쯤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 원하시는 것이 분명히 무엇인지 우리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앞날은 그리 어둡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매일의 삶이 '예수님'이라는 기준에 맞추어 살아가도록 노력했으면 합니다. 우리의 결정이나 선택이 절대적이 아님을 받아들이고, 나의 모습을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방향으로 바꿀 수 있는 용기를 가지고 생활하시기를 희망해 봅니다.

 

 


Writer : 송병선 신부   Date. 2016-07-17 1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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