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 갈릴래아 지방 쿠르시 언덕에서 바라본 풍경 - 갈릴래아 호수가 멀리 보인다.>
"사람들은 배불리 먹었다.....사람들은 사천 명가량이었다."(마르코 8, 8)
오늘 천진암 성지에서는 봉사자 피정이 있었습니다. 파견 미사에서 한 강론을 그대로 올립니다.
평화와 행복을 노래하는 파랑새 한 마리가 여름 동안 나뭇가지에 앉아서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곧 겨울이 올 테지만 이 파랑새는 걱정도 하지 않고 평화와 행복의 노래만을 부르고 또 불렀습니다. 한편 바로 가까운 이웃에 들쥐가 한 마리 있었는데, 들쥐는 파랑새가 노래를 부르는 동안 날이면 날마다 보리밭 옥수수 밭을 들락거리며 곡식을 끌어다 곳간에 쌓았습니다.
어느덧 여름이 가고 겨울이 왔습니다. 허기진 파랑새는 들쥐를 찾아가서 빨간 나무 열매를 한 알이라도 달라고 간청해 보았으나 들쥐는 아주 냉정하게 거절했습니다. 파랑새가 노래를 부르면서 한가하게 보내는 동안, 자신은 너무나도 힘들게 땀 흘리면서 일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추위와 굶주림에 지쳐 버린 파랑새는 마침내 굶어 죽었습니다. 반면에 들쥐는 곡식이 가득 찬 곳간에서 겨우 내내 먹고 마시며 뒹굴었습니다.(여기까지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개미와 베짱이와 같은 내용입니다.)
그러나 이제까지 무심히 흘려보냈던 파랑새의 노래 소리가 어느 날부터인가 갑자기 끊어지자, 이상하게도 들쥐는 쓸쓸한 공허감에 휩싸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때서야 비로소 파랑새와, 파랑새가 불렀던 노래의 의미를 알 수가 있었습니다.
들쥐는 못 견디게 쓸쓸하고 삭막했습니다. 곳간 밖을 내다보며 이리저리 헤매고 다녔으나 허전함을 채울 수가 없었습니다. 이제는 어떻게 해서라도 파랑새의 노래 소리를 다시 듣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그 소리를 다시는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들쥐는 점점 식욕을 잃고 쇠약해져 갔고, 마침내 곡식이 잔뜩 쌓여 있는 곳간 속에서 죽었다고 합니다.
이처럼 우리들은 그동안 너무 들쥐의 철학만을 쫓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앞선 이야기에서 알 수 있듯이, 곡식을 모으는 일만큼이나 노래하고 대화하는 것이 모두가 중요한 일인 것처럼, 세상의 그 어떤 일도 하찮다고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아무런 이유가 붙지 않는 나눔은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빵 일곱 개와 물고기 몇 마리로 4천명의 군중을 배불리 먹이십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그 4천명의 군중이 모두 착한 사람들일까요? 모두 하느님의 은총을 받아야 마땅하다고 말해야 할 만큼 좋은 사람들일까요? 4천 명 정도 되면, 별의 별 사람들이 있지 않겠는가요? 순수하게 예수님 말씀을 들으러 온 사람도 있었겠지만, 나쁜 마음을 가지고서 온 사람도 분명히 있을 것이입니다. 또한 부지런한 사람이 있는 반면, 한없이 게으른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누구도 차별 없이 똑같이 음식을 나누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사랑법과는 너무나 다른 모습이 아닌가 싶습니다. 우리들은 착한 사람은 상을 받고 악한 사람은 벌을 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 판단의 기준은 바로 누구인가요? 바로 나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면서도 이런 판단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저 똑같이 그 누구도 차별 없이 나누어 주신 것입니다.
지금 나는 과연 어떠한가요? 예수님을 따른다고 하면서도, 끊임없이 조건과 이유를 달아서 진정한 나눔을 실천하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요?
한 청년이 추운 겨울에 허름한 옷을 입고 한 조각의 빵을 얻기 위하여 꽃을 파느라 떨고 있는 어린 소녀를 보았습니다. 그는 너무나 측은한 나머지 옆에 서 있는 하느님께 비난을 퍼부었습니다. “당신은 하느님이면서 이렇게 무책임할 수 있습니까? 어찌 저 소녀를 이 추운 겨울에 저렇게 내버려 둘 수 있습니까? 무엇인가 대책을 세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느님은 그 젊은이의 말에 아무런 말씀도 못하신 채 묵묵히 그 젊은이의 말을 듣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날 밤 꿈에 그 젊은이에게 나타나셔서 아주 계면쩍은 목소리로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나는 대책을 세웠다. 그 대책은 바로 너였다.”
나눔, 가진 것을 나눈다는 나눔. 우리는 이 문제에 많은 고민을 합니다. 우선 내 것을 내어놓는 다는 것이 어렵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나눌 것인가도 어렵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서로간의 나눔이 부족한, 그야말로 사랑이 메마를 대로 메마른 각박한 시대입니다. 마치 최면에 걸려 있는 사람처럼 오직 앞만 내다보며 질주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옆을 보기가 어렵습니다. 옆을 보지 못하니 하느님의 모습을 들여다 볼 수 없습니다. 우리 주변에 우리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볼 수 없게 됩니다.
사람이 무엇을 가지고 있고, 또 얼마나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다만 가지고 있는 것을 어떻게 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그 어느 것도 내 것이라고 장담할 수 없습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그것은 내 것이 아니고 다 하느님의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의 속성처럼 나눌 때 그 의미가 살아나면서 우리의 생을 밝혀 주게 됩니다.
나누면 풍부해짐을 우리는 잘 압니다. 사랑을 나누면 사랑이 한없이 커지고, 기쁨을 나누면 기쁨이 또 한없이 커집니다. 마음을 나누면 마음이 커지고 지혜를 나누면 지혜가 커집니다. 그리고 그것이 하느님의 뜻이요 하느님의 소망입니다. 그러나 나누지 않으면 그 자체로 썩고 녹슬게 되어 세상은 악하게 됩니다. 성체성사의 의미가 바로 나눔에 있습니다.
오늘날 문제가 많은 개인, 사회, 교회, 세상은 틀림없이 자신의 생각이나 시간, 물질, 재능 등 가진 것을 나누지 않고 살기 때문에 생겨납니다. 교회와 세상이 매일 매일의 빵 나눔의 기적 없이 어떻게 존속할 수 있겠는가요?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예수님께서 몸소 보여주신 빵의 나눔을 구체적으로 실천하여 일치를 회복하는 데 앞장서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마태오 복음에 나타나는 5천명을 먹이신 기적에 나오는 이름 없고 가난했던 '웬 아이'를 좀 닮아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작은 것부터 온전히 나누는 습관을 익히도록 해야 합니다. 또한 복음에 나오는 “웬 아이”가 “바로 나 자신”임을 깨닫는 신앙인이 되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