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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진암 강학

  • 천진암 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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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진암 강학
  1. 천진암 강학


천진암강학1-김학렬 若望 신부 강의(2017.03.04)
천진암강학 I
 
2017. 3. 4. 15/ 광암성당
 
 
2017 천진암강학 강의 계획 대략.(김학렬 若望 신부)
 
1. 로마 박해 300 - Libellatici + Thrificati + Sacrificati / 10% 5백만명의 신자 / Cf. 세계교회사 / Constantinus 의 밀라노 칙령(313)1700주년 +밀비오교 전투 + 324 베드로 대성전+336 죽음에 앞서 임종세례!!!@성인처럼 인식. --- 베네딕도의 수도생활 -- 1054년 동서 이교 발생 -- 1492발견 이후 Patronatum, Patronato, Padroado에 의한 선교 분할선=Portoghese in Brazil. + 아시아 대륙(필리핀 제외).
 
2. 중국에 천주교 전파
도마사도의 중국 - 네스토리오의 경교 - 마르코 폴로 원나라+ 몬테 코르비노 - 사베리오 방지거(1549.8.15 일본-1552 중국 상천도)와 마태오 리치(1552-1610) / 조전천주십계 & 천주성교실록과 십계명가!/역사자료실.
 
3. 예수회의 문서전교
교우론 - 천주실의/천학실의(1615이후 알레니?) - 천주강생언행기략 - 성경직해 - 직방외기등 천학초함20(+당경교비부) = 지금의 용어 정립/ 야소, 기독, 성신, 성도 등.
천주의 용어는 리치일행이 청년집에 방문하였을 때.= 역사자료실.
 
4. 교우론이 조선에 끼친 영향.
Apostolus, Ecclesia, ConfessioPoenitentia, Baptisma, 아당과 액말
 
5. 이벽성조.(창립자 표현)
칠극과 천주실의(+천주성교실록) => 공부 +기도 +주일 +재계의 신앙생활!
 
6. 이승훈 성현.
이벽 대기지승훈 장송이승훈(@윤유일의 경우) = 두배의 확률로 북경행
 
7. 권철신, 일신 성현.
다비일자 자조입조와 장인 안정복의 장례식 + 신해(진산) 박해.
 
8. 정약용 약망의 가계 / 정철상(중용자잠 15? 상제와 귀신론).
인척관계/ 이벽 + 이승훈 + 권철신 + 이총억, 방억 -이가환.
주교요지와 상재상서 + 백서 101/ 주은지어동국 가위형월심상 초미상전교자래이 주특거사도이친여지계 우이원성사자서지 종종특은 지부승굴 +공인 이씨,선백씨 묘지명 등.
 
9. 성경번역의 역사.
성경번역의 역사 - 천주강생언행기략/ 성경직해 / 바쎄본 (쁘아로 본) - 모리슨 본/5개대표역본(1552) - 예수성교전서(1882?) - 사사성경(1910, 진교사패) - 공동번역.
10. 적응주의와 제사문제.
*세계 교회사 1994년 강의록 참고.
 
*교회사 = 역사학 + 신학 (일부 학자의 편견으로 신학은 역사학(과학)에 따라야?)
참고문헌
1. 아우구스트 프란쯘, 교회사, 1982 분도출판사 (신학총서 22).
2. 김성태, 역사안의 교회, 1985 분도출판사 (신학총서 26).
3. ------, 세계 교회사 I, 1986 성바오로 출판사 (신학선서 11).
4. MICHEL LEMONNIER O.P., Storia della Chiesa, 1981 Vicenza.
 
서론
 
역사란 인간의 과거에 대한 학문으로서, 과거의 경험의 축적이기에 인간생활의 스승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떻게 사건이 진행되었는지를 보면서 앞으로 생길 우리의 미래를 볼 수 있고, 어떻게 대처해야 할 지를 예측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역사적인 지식을 통하여 교훈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하늘 아래 새것이 있을 리 없다(Nihil sub sole novum! : 전도서 1,9)”. 여러 세기를 통하여 인간의 정치, 경제, 사회가 발전하여 비록 양상은 달라졌을 지라도 인간은 항상 같은 인간으로서 줄곧 행복을 추구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역사는 우리의 현실을 올바로 이해하고 살도록 도와주며, 미래를 올바로 대처하도록 이끌어 주는 학문이라고 할 수 있다. 세계교회사의 대강을 알아야 우리나라 교회사도 이해할 수 있으므로 그 가운데 중요한 점을 간단히 소개한다.
 
예수께서 태어나셨을 당시 로마제국은 Octavianus Augustus 황제 시대(29 BC - 14 AD)의 평화를 구가하고 있었고, 로마의 속국인 빨레스틴의 왕은 헤로데 대왕이었다. 교회 역사의 시초라 할 성령강림이 있을 당시인 30-31년에는 Tiberius 황제(14-37)유다의 총독 Pontius Pilatus, 갈릴레아와 뻬레아 지방의 영주 헤로데 안티빠스가 있었다.
신약성서가 전하는 구원의 역사를 보면, 예수 그리스도는 때가 다 되어”(갈라 4,4 ; 마르 1,14) 이 세상에 오셨다. 당시 유다인들 사이에서는 약속된 메시아에 대한 갈망이 대단하였다. 이는 종교적인 동기라기보다는 정치적으로 불행한 조건에 더욱 더 기인하는 것이었다. 반세기 전부터(63) 유다인들은 로마의 지배를 받았고, 국가의 개념과 종교관을 불경하게 만든 인물들에 대한 증오심이 강하였다.
헤로데 대왕은 체살의 친구였던 이두메아 출신의 Antipatro의 아들로서 본래 외국인이었고, 로마 원로원으로부터 유다인의 왕이란 칭호를 받았으므로 로마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 노력하여야 했고, 내부적으로는 위험스런 열혈당원들에 대처하여야 했다. 처음부터 자신의 위치를 강화하기 위해 무력을 사용했고, 백성들의 증오와 하스모네아 안티고노 영주가 이끄는 저항세력에 대처하여야 했다. 따라서 그는 로마의 도움으로 이같은 저항을 물리치고 37년에 예루살렘을 정복함으로써 하스모네아 왕조의 종말을 고하게 하였다. 이로써 100년전에 유다 마카베오 형제들이 시리아의 세력 앞에서 유다의 종교적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 힘쓰던 (142 독립) 영웅적인 모습이 사라지게 되었다.
헤로데는 성전재건, 신도시 건설, 문화와 상업의 육성 등으로 백성들의 증오를 피하려 노력하였지만 점점 악화되기만 하였다. 그는 3명의 아들에게 왕국을 분할해 주었다. 그러나 분할에 따른 혼란으로 로마인들이 다시 개입하여 아우구스토 황제는 6년에 아르켈라오를 폐위시키고 총독부를 체사레아에 설치하여 군사적인 안보와 경제를 통솔하게 하였다. 한편 대사제가 관장하는 의회(산헤드린)는 유다의 내부일을 관할하였다. 그러나 이같은 조치로도 기대하였던 만큼의 정치적 안정을 얻지 못하였으므로 예루살렘에 로마사무소를 상주시켜 세금을 징수함으로써 유다인들에게 국가적인 모욕감을 자극하였다. 정치적 지배자와 피지배자 사이의 팽배하는 긴장은 유다인들의 종교적인 영성에서 기인하는 것으로서 로마인들은 이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I. 천주교회의 두 기둥 = 순교자들의 증거 + 사랑Caritas 활동
 
+ (있는) 힘을 다하여,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라. = 신명기 6,4- ; 마태 22,34-
// 율법교사의 질문= 가장 큰 계명이 무엇입니까? J의 답 =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 +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레위 19, 18)
교회는 시초부터 지금까지, 특히 성무일도 끝기도(주일 I)를 바치면서 이 말씀을 확인하고 실천하려고 노력해 왔다. 신앙생활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 = > 개신교의 오직 믿음만으로(야고보서: 행동없는 믿음 = 갈라디아 5,6/할례보다는 사랑으로 행동하는 믿음이 중요) =>1코린토 13= 곧 사랑으로 구원!
 
>. 교회의 첫째 기둥은 순교자들의 증거 (사도들 +로마순교자)
 
내가 공부한 로마는 영원한 신앙의 도시로서, 베드로와 바오로의 순교지였다. 베드로 사도의 무덤을 대성전 지하 발굴 현장에 찾아가서, 교수 신부와 함께 신앙을 고백하였고, 바오로 사도의 순교장소인 Tre fontane (머리가 세 번 튄 장소에 솟은 샘)를 찾아, 있는 힘을 다한 두 사도의 신앙을 본받고자 하였다.
 
* 베드로 사도 (# HUBERT JEDIN, I, 142 이하)
 
바울로 사도의 선교활동이 광범위하고, 깊이 있고 결실이 많았던 반면에, 다른 사도들은 그보다 더 멀리 떨어진 동방이나 서구 제국에서 활동하였지만 상대적으로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바울로 자신도 ; “ 그리스도의 이름이 아직 알려지지 않은 곳에서만 복음을 전하려 하였고, 남이 닦아놓은 터전에 집을 짓지 안으려고 하였다” (로마 15,19이하) 고 주장하면서 다른 사도들의 활동이 많이 있었음을 이야기 하고있다. 따라서 다른 사도들에 의해 이룩된 지역 공동체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지방과 도시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기에 알 수가 없고, 다만 사도행전에서 바울로 사도가 이룩하지 않은 선교의 사실을 가끔 언급하고 있을 따름이다. 예를 들면, 바르나바는 바울로와 헤어진 후 키프로스로 가서 전교했으며 (사도행전 15,40), 이태리 지역의 나폴리 근처에 Pozzuoli 공동체가 있다는 사실을 로마로 여행하는 과정에서 언급하고 있다. 바울로는 이 항구에서 그들 곁에 머물러 달라는 형제들을 만난다 (행전 28,14). 또한 그의 도착을 이미 알고 있는 로마 공동체의 일원들과도 만났으나 (28,15), 누가 이 공동체를 이룩하였는지 그 선교사에 애해서는 이름을 밝히지 않고 있다. 바울로의 선교지역이 아닌 곳에 대한 언급은 베드로 전서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베드로는 본도, 갈라지아, 까빠도치아, 아시아, 비티니아의 신자들을 언급하고 있다 (1,1). 이 지역중 아시아를 제외하고는 바울로의 선교지역이 아니었을 것이다. 행전 2,9 이하에서 강림절에 예루살렘에 모인 지방 사람들을 열거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들 지역에 초기의 선교사들이 파견되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베드로 전서의 언급으로 보아 이들은 이교도 출신의 신자들이었을 것이다.
이같이 베드로와 요한, 그리고 차 야고보에 대한 약간의 언급을 제외하고는 다른 사도들에 대해 침묵을 지키고 있기에, 초기 교회사에는 공백상태가 나타난다. 다만 2/3세기의 위경들을 통해 그 공백이 메워지기 시작하면서, 여러 사도들의 생애와 죽음을 언급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사료들은 영웅적이고 환상적인 묘사로서 그 신빙성이 희박하나, 베드로와 요한, 야곱에 관한 사실들은 사료로서의 가치가 있다.
 
<베드로의 로마 체류와 죽음>
행전은 베드로의 활동과 예루살렘 공동체의 모습을 기술하는데 있어 <다른 곳으로 향했다>(12,17)고만 기술하고 끝맺었다. 왜 떠나갔는지, 어디로 향했는지에 대해서는 확실히 알 수가 없게 되었다. 그러나 베드로의 로마 체류와 죽음에 대한 교회의 전승은 너무도 확실하다. 그렇지만 그 구체적인 여정이나 체류기간에 대해서는 확실히 알 수가 없다. 확실한 것은 베드로가 예루살렘 공의회에 참석하였고, 그 후에 안티오키아로 갔다는 사실 뿐이다 (행전 15,7 ; 갈라디아 2,11-14).
베드로에 관련된 로마의 전승은 세가지 사료에 의해서 입증이 되고 있다. 거의 같은 시기에 같은 비중을 지니면서 역사적 확실성을 증거하고 있다. 첫째는, 로마 출처의 사료로서 끌레멘스가 코린토에 보낸 첫째 편지이다. 여기서 끌레멘스는 최근에 그곳의 신자들이 시기와 질투 때문에 죽기까지 박해를 받았음을 전해주고 있고, 이야기 속에서 베드로와 바울로를 언급하면서, << 베드로는 시기 때문에 한두 번이 아니라 여러 차례에 걸쳐 고난을 받아야 했고, 영광의 자리를 차지했음을 증거하고 있다>> (1Clemens 5,1-4 ; 6,1-2) 고 말한다. 그와 함께 수많은 신자들이 순교하였는데, 그 중에는 Danaids Dircae 처럼 여인들도 사형에 처해졌다고 한다. 이는 네로 황제 치하에서 신자들이 박해를 받았음을 암시하는 것으로, 5-8장에서는 네로가 베드로를 사형에 처하였고, 시기적으로는 60년대 중반에 이런 일이 있었음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처형 장소나 방법에 대하여는 아무 말이 없다 - 그의 침묵은 수신자들이 그가 살던 시대에 그가 살던 곳에서 일어났다는 것을 이미 기정사실로 알고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사실을 확증하는 또 다른 사료는 그보다 20여년 뒤에 쓰여진 것으로, 동방에서 로마 공동체에 보낸 이냐시오의 편지이다. 여기서 동방의 주교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는 두 사도들에게 일어났던 사실을 상기시키면서, 그 도시에 가서 순교하려는 자신의 열망을 이교도들에게 청함으로써 막지 말아달라고 부탁하고 있다. 그는 베드로와 바울로처럼 여러분께 명령하지는 않습니다 라는 표현을 통해 사도들에 대한 존경심을 나타내고 있다 (로마인들에게 4,3). 이같은 언급은 두 사도들이 한 때 로마 공동체와 관련을 맺었고, 따라서 이 공동체에 대해 권위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다시 말해서 사도들이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오랫동안 머물렀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며, 지나가는 방문객들처럼 여행 중에 들렀던 것이 아님을 말해준다. 베들로가 로마에 체류하였다는 것을 먼 곳의 동방 신자가 알고 있었다는 것은 증언의 신빙성이 크다는 것을 입증한다.
이냐시오의 편지에 곁들여 베드로의 로마 체류와 순교를 확증하는 3의 사료는 이사이야 승천기이다 (4,2 이하). 이 승천기는 100년경에 그리스도교에서 개작한 것으로, 12사도들의 업적이 모친 살해자인(Nero) Beliar에 의해 박해를 받을 것이고, 12사도 중 한명은 그의 손에 죽을 것이라고 예언적 형태로 묘사하고 있다. 이같은 예언은 2세기 초에 기록된 베드로 묵시록의 단편으로도 재확인 되고 있는데, << 너 베드로에게 모든 것을 밝히노니, 음행의 도시로 가거라. 그리고 내가 일러주는 잔을 마셔라>> (희랍어본, JThS 32 (1931) 270) 고 묘사하고 있다. 이 문헌은 베드로가 네로의 시대에 로마에서 순교했음을 알고 쓴 것으로, 로마의 전승과 일치하는 것이다.
이상의 세가지 문헌 이외에도 2가지 다른 언급이 베드로에 관한 로마의 전승을 보완하여주고 있다. 요한복음의 마지막장 집필자는 베드로의 순교를 암시하며, 그의 십자가형을 알고 있으나 (21,18이하), 순교 장소에 대하여는 침묵을 지키고 있다. 한편 베드로의 체류지에 대하여 베드로전서의 마지막 구절에서 바빌로니아에서 이 편지를 기술하였음을 확인하고 있다. 로마가 바빌론이라는 사실은 요한 계시록 14,8 ; 16절 이하에서 확인 되고 있고, 유다.랍비 묵시문학에서도 확인되고 있다.
그밖에도 베드로에 관한 로마의 전승에 관하여 코린토의 디오니시오 (Esusebius, HE 2,25) 리옹의 이레네오 (ADV. HAER, 3,1-3), 그리고 떼르뚤리아노 (Praescr.haer. 36,3)의 증언 등 여러 지역의 증언으로도 확증되고 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러한 전승에 대하여 반대하는 견해와 사료가 없다는 사실이다. 이를 반증할만한 다른 전승이 전혀 없는 것이다.
 
<베드로의 무덤>
베드로의 마지막 체류지와 순교지에 관하여는 베드로의 현 무덤과 일치하느냐에 대한 견해들이 복잡하게 얽혀있다. 문헌상의 증언과 고고학의 증거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데, 무덤의 발굴과 사료에 대한 심사는 시대에 따라 현 무덤에 관한 전승과 의견을 달리하기도 한다. 베드로의 순교지가 바티칸 언덕이라는 주장Tacitus, Annali 15,44 에서 네로의 박해와 관련하여 언급되고 있고, 1 Clemens 편지와 함께 제피리노 교황시대의 (199-217) Gaius 의 증언으로 확인되고 있다. 가이오는 로마의 몬타니즘 대표였던 Proclo 와의 논쟁에서 사도들의 무덤이 로마에 있다는 사실을 들면서 사도 전승성을 주장하고 있다. 그 이전에도 에페소의 Policrate 주교는 빠스카 축일 문제를 언급하면서, 사도들과 소아시아 지역의 주교들이 로마에 있다는 사실 때문에 동방의 관습을 전통으로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같은 견해의 예로서 Proclo는 필립보 사도와 그의 딸들의 무덤이 Hierapolis에 있다는 사실에서 몬타니즘의 근원을 제시하려 한다. 이에 대해 가이오는 ; << 나는 사도들의 유적을 제시할 수 있다. 바티칸이나 Ostia 길을 가게되면, (로마) 교회를 창립한 분들의 영광스런 무덤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라며 반대자에 대항하고 있다. 로마에서는 200년 경에 베드로의 무덤이 바티칸 언덕에 있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던 것이다.
354년의 로마 축일표는 258.6.29.에 성 베드로를 기념하여 바티칸에서 축일을 지냈고, Ostia 가에서는 성 바울로를 기념하여 축일을 지냈으며, 두분의 무덤이 Catacumbas 있다고 한다. 260년 경에는 Appia 가에 있는 성 세바스티안 무덤성당이 (4세기에는 사도들의 교회로 불리었다) 두 사도들을 공경하기 위하여 봉헌된 장소였다고 한다. 다마소 교황이 지은 서정시에도 두 사도들이 한 때 그곳에(Sebastiano - Catacumbas) <거주했다> 고 표현하고 있는데, 이는 한 때 그곳에 뭍혔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1917년의 (세바스티안)발굴260년경에 두 사도들이 망자들의 휴식처에서 공경을 받았음이 벽화를 통해 입증되었고, 그 곳 (세바스티아노)에서 순례자들이 두 사도의 간구를 청하였음을 알 수 있다. 사도들이 뭍혔던 무덤의 흔적은 발견할 수 없었지만, 일부 벽화에서는 순례자들이 이곳에 두 사도들의 무덤이 있었다는 확신을 가졌었다는 것이 확인 되었다. 이 발굴로 여러 가지 가설이 생겨나게 되었지만, 이제까지 결정적인 사실은 하나도 없다. 발굴을 주도했던 사람은 Appia가에(세바스티안) 두 사도의 무덤이 있었다는 가설을 지지하면서, 바티칸의 콘스탄틴 성당 건축(324) 후에 이전되었다고 보았다. 한편 다른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바티칸과 오스티아 가의 무덤에서 발굴한 유해들이 Valerianus황제의(253-259) 박해시에 유해의 안전을 위해서 성 세바스티안으로 이전시켰고, 새 성전으로 이전할 때까지 그곳에 모셨으리라고 본다. 그러나 일부의 주장은 로마법이 무덤의 열람을 강력히 금지하였다는 점으로 보아 Appia가의 성 세바스티안으로 이전시켰을 가능성을 배제하고 있다. 그렇지만 노바시안 같은 일부 이교 분파에서는 사도들 공경의 중심지를 Appia 가의 무덤(세바스티안) 이라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결국 성 베드로의 무덤자리가 두 곳이라는 사실은 로마 공동체가 3세기 이후부터는 사도들의 무덤이 정확히 어느 곳에 있는지 알지 못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다. ( 박해와 가난한 어부에 불과하였던 베드로 ! ) 가이오를 대표로하는 그룹에서는 바티칸 언덕의 Tropaion(중앙 제대?) 밑에 베드로의 무덤이 있다고 생각하였을 것이고, 다른 그룹에서는 Appia 가에 있다고 주장하였을 것이다. 이리하여 로마의 지도자들은 콘스탄틴 대제 이후 전승의 마찰을 피하기 위하여 두 곳에 성전을 지어, 바티칸에는 성 베드로 성전을 짓게 하였고, Appia 가에는 사도들의 교회를 지어 후에 성 세바스티안 성당이란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축일표에 나오는 629일은 Appia 가에서 있었던 첫번째 예식과 관련이 있어 생겨난 것이다.
1940-49년에 있었던 현재의 성 베드로 대성전의 지하 발굴 작업으로 수많은 무덤들이 거리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다. 서쪽 언덕 쪽으로 수많은 무덤들이 장식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들 중 한 석관만이 순수한 그리스도교인의 것으로, 고대 그리스도교 성화에 큰 가치를 지니는 Cristo - Helios 라는 모자익이 발견되었다. 이 석관들은 130 - 200년 사이의 것들이지만, 이 석관은 광활한 묘역의 일부일 뿐이며, 특히 동쪽으로는 더 오래된 무덤들이 시작되고 있었다.
 
 
용감히 순교한 신자들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배교자들도 많았는데,
배교자 유형=Libellatici+Thurificati +Sacrificati /박해후 문제점!
 
로마의 20만명 순교자들은 상대적으로 더 포악했던 옛 시기에 300년에 걸친 긴 박해의 시기였기에, 우리나라의 1만명 순교자들보다 더 많았다. 위대한 순교자들의 신앙은, 마음과 목숨, 힘과 정성을 다한 사랑으로서, 우리들이 일상생활 속에서 본받기로 다짐하며 신앙고백의 삶을 실천하여야 한다.
 
 
 
 
>. 교회의 둘째 기둥은 Caritas => 현대교회의 모습으로 이어짐!
 
* 로마 제국 당시의 사회상
Pax Romana (P. Americana 현시대) 의 이상 (행복/실컷 먹고 놀자!)Panem et Circenses 였다. (향락과 원형경기장 Circo Maximo, Colosseum ! )
5천만 지중해 연안 제국 인구의 수도 로마는 1백만 명의 로마인(50만 노예) 영화를 누리며, 400개의 신전에서 잡신들에게 제사를 지내고 있었다. 그러나 사회의 기초인 가정은 이혼과 간음으로 파괴되어갔고, 계층간의 불균형 속에, 노예를 부리며 호화생활을 구가하였다. 대신 전쟁 포로인 노예들은 농장과 광산에서 노역에 시달리고, 원형 경기장의 인간 재료로서 칼싸움과 맹수의 희생물이 되었다.
 
** 천주교 박해의 원인은 불을 일으키는 폭도들로서, 제국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무신론자란 죄명이었다. / 불타는 로마는 64 건기인 718-25 한 주간 동안에, 시내의 14구 중 3구 전소되었고, 7구 반파 되는 가운데, 겨우 4구만 안전할 수 있었다.
 
** 박해
1). 네로황제(54-68)의 박해
역사가 수에토니오는 49년경에 이미 로마에는 유다공동체 내에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있었다고 전하고 있다. 당시 로마의 위정자들은 유다교의 문제로 신자들을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당시의 신자들은 대부분 히브리인들이었고, 민족의 자치권을 상실한데 따른 소요를 일으켜 왔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민중들 역시 신자들을 유다인들과 혼동하고 있었으며, 유다인들과 같은 비난의 대상으로 삼았다. 그러나 점차로 신자들에 대한 정통 유다인들의 고발이 빈번해 지게 되고, 때마침 발생한 로마의 화재(64718-25)에 대한 책임으로 신자들은 비난의 표적이 되었다. 황제는 자신에게로 쏠리고 있는 비난을 전가시킬 대상을 그리스도교인들에게서 찾았다. 이것이 로마제국에 의한 박해의 시초이며, 타치투스는 신자들을 무신론자들이며 인류의 적이라고 묘사하였다.
네로의 공작정치로 많은 신자들이 붙잡혀 처형되었다 (2/300- 1,000명설). 군중에게 볼거리를 제공하기 위하여 사형집행에는 체형이 가하여졌고 황제의 정원에서 실행되었다. 희생자 중에는 베드로와 바울로 사도도 끼어 있었다(67). 교회전승에 의하면 베드로는 못 박히신 그리스도께 대한 겸손의 표시로 거꾸로 매달려 순교하였으며,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던 바울로는 참수형을 받았다.
(바티칸 무덤 방문기 : 교수와 함께 신경 ; Trapist 수도원 옆에 있는 약수터 Tre fontane). 박해에 대한 로마인들의 반응은 강하였으며, 이후 신자들은 곧 폭도를 의미하였고 사형에 처할 죄인들로 여겨지게 되었다.
 
2). 카타콤바와 순교자들의 수(Martina, 35-38).
 
1800년대의 낭만주의 사학자들은 신자들이 카타콤바에서 상례적으로 전례를 거행하였고, 더 나아가 박해자들의 손길을 피해 은신하여 기거하던 장소였다고 주장하였으나, 사실은 신자들의 무덤에 불과하였다. 거처로 사용하지 않았을 뿐더러 일상적인 전례의 장소도 아니었다. 다만 신자들의 지하무덤이었고, 그 장소에 대해서는 로마의 경찰들도 이미 잘 알고 있었다. 신자들의 무덤이 새롭고 특이한 것도 아니었다. -- 신자들이 믿음의 동료들과 함께 묻히기를 원한다는 것은 극히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지하무덤을 사용하는 풍습은 히브리인들이나 Etrusco 들과 그 밖의 다른 민족들도 가지고 있었다. 또한 로마의 지형은 넓은 석회층으로 되어 있어 파기가 쉬운 반면에 부서지지 않는 성질을 가지고 있었다.
카타콤바란 단어는 성 세바스티아노 무덤이 “Ad catacumbas, 움푹 파진 곳에 있다고 한데서 유래된 말이었다. 큰 카타콤바들은 로마시대에 사방으로 뚫린 큰 길가를 따라 산재해 있었다. (S. Calisto, Sebastiano, Domitilla, Priscilla, Agnes...). 초기에는 이 무덤들이 신자인 지주의 것이었고, 후에는 교회의 소유로 전환되어 관리하게 되었다.
257년의 발레리아노 황제 때까지는 무덤의 사용을 허용하고 있었으나, 점차적으로 카타콤바에서의 모임을 금지하게 되었고, 303년의 디오클레시아노 이후로는 입구를 막아버리거나 국가의 소유로 징수하여 버렸다. 그러나 박해가 끝난 다음에 다시 사용하게 되었고, 대부분의 부덤들이 바로 이 4세기의 것으로 보인다. 5세기 이후부터는 오래된 무덤들에 대하여 신심을 갖게 되었고, 8세기에는 롱고바르드 족의 침입으로 순교자들의 유해를 시내 안의 성당으로 모시게 됨에 따라 카타콤바의 의미가 점차적으로 잊혀지게 되었다. 그러다가 1800년대에 다시 관심이 일어 조직적인 발굴과 과학적. 고고학적인 연구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지금까지 알려진 카타콤바 내의 동굴의 총연장은 100 Km 정도로서, 1m 5구의 무덤이 쓰여진 것으로 계산한다면 대략 50 만구의 무덤이 있다. 사용년대는 150년부터 400년까지로서, 250여년간 사용되었다고 본다.
 
***<순교자들의 숫자>
이름이 확인되고 있는 순교자들은 1,000 여명이다. 그밖의 많은 순교자들은 확실한 문헌이 없어 확인할 수 없으나, 여러 카타콤바에 안치된 순교자들 가운데 주보 성인 순교자만을 공경하고 있고 다른 순교자들은 잊혀진 상태이지만 당대의 사람들이 무수한 순교자들을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숫자는 대단할 것이다. 그렇지만 순교자들이 수백만명에 달한다는 주장은 합리적이라고 할 수 없으니, 디오클레시아노 황제때에 신자들의 숫자는 500만명 정도에 불과하였기 때문이다.
순교자들의 수를 어느 정도 추정하여 볼 수 있겠는데, 먼저 디오클레시아노 황제 때에(284-305) 순교한 사람들이 다른 박해 때에 순교한 숫자와 거의 비슷하다는 점이다. 그 이전의 3세기 동안에는 신자들의 수효도 상대적으로적었고, 박해의 기간도 짧았으며 산발적인 것이었기 때문이다. 디오클레시아노 황제 때에 주교가 있었던 공동체의 숫자를 1,000 으로 본다면, 매 교구마다 50의 순교자를 가정할 때 5만명의 순교자를 가정할 수 있다. 4대도시인 로마, 카르타고, 안티오키아, 알렉산드리아에서 순교한 숫자를 4만명정도로 추정할 수 있어, 황제의 대박해 기간중 순교자는 9명에 달할 것이다. 그 이전의 3세기 동안의 순교자를 같은 수로 볼때 전체 순교자들은 18만명 정도가 될 것이다. 역사가들은 일반적으로 10만명 정도의 순교자를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직접 순교자들 이외에 귀양, 고문, 재산몰수 등으로 신자들이 항상 죽음을 앞에 두고 살았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소외된 자들에 대한 관심과 배려가 사랑의 행위로 들어나, 교회가 발전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 종교의 자유시대에 급증한 신자수 !
 
 
>. 수도생활의 발전( = 하느님 사랑+이웃 사랑의 선택)
 
박해시대에는 순교가 그리스도를 닮고 천국의 영광에로 나아가는 최대의 은총이었다. 그래서 있는 힘을 다한 삶으로 목숨을 바치는 삶을 선택하였다.
황제의 관용시대(콘스탄틴/313) 이후 박해가 끝나자, 교회는 재산과 신자 수에서는 성장하였으나, 신앙과 도덕면에서는 쇠퇴하게 되었다. (성 예로니모).
그러므로 주님의 말씀에 따라서, 완덕에 이르는 길을 찾아 세상을 피하는 수도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Monos -> Monacus, Monk = 하느님과 홀로 지내는 삶) 옛 연도에서는 이를 회수자와 독수자로 부르고 있다.
 
 
>. 우리나라의 숙제
 
우리교회의 현실도 초기 로마교회의 모습을 그대로 담고 있다. 순교자들의 증거가 생생히 살아있고, 이웃에 대한 사랑도, 특히 수도자와 성직자들의 모범적인 삶으로 계승되고 있다.
 
>: 우리나라의 제 3대 신부님들 / 정규하 + 강도영 + 강성삼
첫 본당에서 숨을 거둘 때까지 그 본당신부로 머물면서, 그 시대의 문제에 대면하며 최선을 다하였다. 그 어려움 속에서도 고아들을 돌보는 본당의 모습을 정규하 신부님의 편지 속에서 확인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제 3호 신부님들은 3명인데, 김대건과 최양업 신부님에 이어, 페낭 신학교에 유학했던 분들로서 1896년에 서품을 받고는, 바로 본당으로 나가서 평생 동안 그곳 본당에서 살다가, 그곳에서 돌아가셨다. 특히 정규하 아오스딩 신부님은 단내의 순교자 집안 출신으로서, 용인 지방에서 1801년 신유박해 후, 신태보 베드로 순교자가 40여명의 신자들을 데리고 이주한, 풍수원 본당에서 강원도 전체를 50 여 년간 사목하셨다. 평생 동안 삶과 신앙과 사랑을 신자들과 나누는, 진국이 우러나는 본당 신부의 삶이었던 것이다. 처음으로 본당에 부임하여 성모승천 축일을 지내면서 세례식을 거행하였는데, 280리 길을 걸어서 세례를 받으러 온, 영월 주실 마을의 아주머니도 있었다. < 그 본당신부에 그 신자들이었다.>
 
 
* 지금 우리들의 현실 순교에 대하여서는 성 아우구스티노의 말씀이 그 해답이다. 박해로 인한 순교자들의 시대 이후 수도자들의 삶을 살던 때, 세상에 사는 신자들에게 하신 성 아우구스티노의 말씀은: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에 대한 답으로, 현대의 순교는 매일의 현실 속에서 가장 큰 사랑( =마음, 목숨, , 정성 다한 삶)을 선택하는데 있다. 그러므로 지금도 우리의 순교는 가능하다!
 
 
** 로마교회의 모습 : 우리의 현재 모습
인구 5천만명 + 신자율 10% + 순교자들의 증거와 이웃사랑이 있다. 그대로 실천하면 된다. 로마 교회는 급속히 성장하였다. 우리도 그렇게 하면 된다. // 그러나 이런 증거의 삶이 없으면, 급속히 식어져 서구교회의 모습을 닮아 갈 수도 있다.(현 교황 프란치스코는 성인의 모범을 따라 교회의 새 복음화를 위하여 노력 중이다.)
 
*하느님 나라의 정원에는 꽃이 만발합니다. 순교자들의 빨간 장미꽃, 동정자들의 흰 백합꽃, 기혼자들의 담쟁이 꽃, 과부들의 제비꽃 이 있습니다. (나의 말 : 순진무구한 어린이들의 안개꽃도, 언제나 주님을 향한 우리들의 해바라기와 달맞이꽃도 있습니다.) !!! (성 아우구스티노, 성무일도 독서 = 810일 성 라우렌시오 부제 순교자 축일)
 
이렇게 로마 교회는 순교자들의 증거와 수도자들의 열성으로 선교가 급속하게 진행되었다. 천년 경에는 유럽 전체가 그리스도교화 되었다. 그러나 긴장이 늦춰지면 문제가 생기듯이(; 사격장), 1054년에 동방교회가 갈라져 나가는 것을 시작으로 쇄신하지 못하는 교회에는 문제가 계속 생겨나게 된다.
 
 
3). 이단異端(haeresis, heresy)과 이교離敎(schisma, scism).
 
(1). 이단 /4세기의 교의논쟁 : 삼위일체의 신앙
 
1). 아리아니즘 : cf. H. JEDIN, Arianensimo
교회는 이제까지 양자설을 반대하면서 그리스도의 신성을 믿고 주장하여 왔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신성과 함께 성부에게는 종속된다는 개념으로 성자를 하나의 하위계급으로 가르치는 경향이 있어 모순을 내포하고 있었다. 성자가 하느님이요, 성부와 함께 한분의 하느님이고 성부와 같은 분이라고 한다면 어떻게 성부보다 낮은 분일 수 있겠는가? 4세기초 아리아니즘의 등장은 이같은 종속설에 대하여 성자의 절대적인 신성과 성부와 같은 본성을 지니고 있다는 동질성(Consubstantialis)의 개념을 확정짓는 계기가 되었다. “성부는 나보다 더 위대하신 분”(요한 14,28) 이라는 말씀을 일방적으로 해석하고, 예수께서 자신을 성부와 같은 분이라고 계시하시는 말씀을(요한 10,30 ; 17,5) 망각한 아리우스와 그 추종자들은 성자를 성부의 첫 피조물로 이해하기에 이르렀다.
Arius(260- 336) 리비아에서 출생하여 안티오키아의 루치아노 학파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는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구별에 중점을 두었으며, 객관적인 성서의 해석과 다능한 언변으로 에집트에서 논란을 일으키게 되었다. 313년에 알렉산드리아의 Baucalis 주임신부로 임명되었고, 엄격한 금욕생활과 시적인 감각, 활달한 언변으로 성직자들과 신자들 사이에서 인기를 얻고 있었으나, 정통신앙과 반대되는 모호한 표현의 설교, 특히 향연(탈레이아)라는 소책자를 통하여 성자의 극단적인 종속설을 주장함으로써 318년경에 알렉산더 주교와 충돌하게 되었다.
그의 가르침 중에는 : 말씀은 영원하신 분이 아니라, 시간 속에서 무로부터 창조된 분이며, 단순한 피조물로서 변화가 가능하고, 하느님의 특별한 도우심이 없이는 죄에도 떨어질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성자는 오직 첫 피조물로서 다른 피조물보다 우월할 뿐이라고 한다. 창조의 도구로서 하느님께서 자유로이 창조하셨지, 필연적으로 낳음을 받은 분이 아니라는 알렉산드리아의 필로의 전형적인 개념을 따르게 된다. -- 하느님과 세상은 직접적으로 관계를 맺을 수 없을 만큼 초월적인 절대존재이다( 극단적인 종속설로서 그리스도교적인 영지주의의 영향을 받아 성자를 데미우르고스처럼 생각하였으며, 아리스토텔레스적인 논법을 따랐다). -- 말씀은 이후 양자의 관계로 올림을 받았고, 하느님이라고 부를 수는 있으나 하느님과는 다른 속성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개념을 두개의 문장이 단적으로 표현해주고 있는데 : “말씀이 존재하지 않았던 때가 있었다. 말씀은 무에서부터 나왔다(Erat, quando non erat. Quod de non exstantibus factus est)”는 것이다.
아리우스의 학설이 파급되는 것을 염려한 알렉산더 주교는 100여명의 에집트 주교들을 소집하는 대 시노드를 열어(318) 아리우스와 그의 추종자들(6명의 주교와 신부)을 파문하고 알렉산드리아에서 추방하였다. 그러자 아리우스는 즉시 체사레아로 건너가 그곳의 주교이며 교회사가인 에우세비오의 동조를 얻게 되었고, 이에 힘입어 당시 황제궁에 있었던 니코메디아의 주교 에우세비오의 동조도 얻게 되었다. 이후 여러 번의 시노드가 개최되었는데, 니코메디아에서는 아리우스에게 유리한 결정이 내려지게 되었고, 안티오키아에서는 그를 단죄한 알렉산드리아 시노드의 결정이 확인되었다. 그러나 니코메디아의 결정이 더 큰 힘을 발휘하여 그는 알렉산드리아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때에 콘스탄틴 황제는 교회와 제국의 평화를 염려하는 가운데 두 학설의 중재자로 나서는 것이 자신의 임무라고 확신하여 코르도바의 주교 호시우스를 파견하여 일치를 도모하였으나 성과를 거둘 수 없었고, 대신 이에 관한 정보를 많이 입수함으로써 대 공의회를 소집하게 되었다.
2세기부터 교리와 규범에 관한 문제들을 다루기 위한 시노드들이 여러곳에서 자주 열리고 있었으나, 지금의 이 문제는 전제국에 파문을 일으키고 있었던 논쟁이었으므로 황제는 제국의 국경 밖의 주교들까지 소집하는 대공의회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이리하여 공의회는 실베스트로 교황이 아닌 황제의 명으로 소집되었고, 황제는 고급공무원들이 이용하던 “Cursus publicus” 라는 교통수단을 주교들에게 제공하였다. 공의회는 325.5.30 에 황제가 참석한 가운데 니체아에서 열리게 되었고, 황제는 하느님의 천사처럼성대하게 입장하여 개막연설을 통해 교회의 평화를 이루어 주기를 요청하였다. : “나는 하느님의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내적인 문제들을 전쟁이나 격전과 같이 두렵게 생각하고 있으며, 또한 승리하기가 매우 힘들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나는 외적인 전쟁보다도 이 문제를 더욱 더 염려하고 있습니다...”.
공의회에는 300여명의 주교들이 아직도 박해로 인한 고문의 상처들을 간직한채 참석하였다. 그러나 3명의 서구주교와(이태리, 갈리아, 스페인) 2명의 아르메니아 주교, 1명의 페르시아 주교가 참석한 것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동방의 주교들이었다. 교황은 2명의 신부를 대리로 파견하였으나 큰 역할을 하지는 못하였다. 전통적인 견해로는 아브라함의 종의 숫자가 318이라는 데서 상징적으로 318명의 주교들이 참석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개막연설 후의 사회자는 황제의 궁정주교로 와 있던 코르도바의 호시우스(257-357)였다.
아리우스의 몇가지 특징적인 학설이 낭독되었고, 대부분의 주교들은 일치된 가운데 이 교리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확인하였다. 그러나 정통신앙을 표현하는 방법에 있어 이견이 속출하였다. 일부는 성서에서 사용된 용어로 한정시키려하였고, 일부는 아리안파의 잘못된 해석이 개입하지 못하도록 보다 명확한 용어로 규정하기를 바랐다. 체사레아의 에우세비오가 자기 교구에서 사용하는 신경을 제시하였으나 너무 일반적이고 모호한 표현(말씀은 하느님에게서 왔다는)이라 하여 기각되었고, 아리우스의 오류를 일축할 수 있는 다른 본문이 작성되어 말씀이 성부께로부터 영원한 낳음을 받으셨다는 것과 성부와 동질성을 지니고 계심을 명시하게 되었다 : 말씀은 성부의 본체이시며, 창조되지 않고 낳으셨고, 성부와 동체(Homoousion to patri)이시다 ;Dominum nostrun Iesum Christum Filium Dei, natum ex Patre unigenitum, hoc est de substantia Patris, Deum ex Deo, lumen ex lumine, Deum verum de Deo vero, natum, non factum, unius substantiae cum Patre...”.(DS 125 참조). 마지막 단어인 Homoousios 는 전에 이단자들이 다른 의미로 사용한 바 있었으므로 동방의 주교들은 이 표현을 싫어하였으나, 실제로는 성자의 신성을 정의하는데 알맞는 말이었으므로 정통교리의 기본조항이 되었다. 결국 니체아 신경은 아리우스가 주장하는 교리를 명시적으로 단죄하였으나, 그의 이름을 거론하지는 않았다.
채택된 신경을 두고 2명을 제외한 모든 주교들이 동의하며 서명을 하였고, 아리우스와 그 추종자들은 귀양형에 처해졌다. 그리고 몇가지 규범문제로서 빠스카 축일과 독신제 등이 논의되었으나 일치에 도달하지는 못하였다. 공의회는 한 달 후인 629일에 폐막되면서 정통교리를 확정하였으나, 아리아니즘의 위험이 제거되기에는 아직도 험난한 길을 거쳐야 했다.
(공의회 이후) 니체아 공의회로 아리아니즘에 관한 원칙은 해결되었으나, 실제적인 논쟁은 381년의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때까지(성령의 관계를 논한 신경을 확정하였다. DS 150 참조) 계속되었다. 신학문제에 문외한인 황제들은 궁정 성직자들의 사주로 국가의 공권력을 동원하면서 문제에 개입하였고, 근본적으로는 용어의 불확실성에도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에는 희랍어의 ousia(본체)hypostasis(위격)를 동의어로 혼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Hypostasis 란 용어는 본래 라틴어의 substantia 란 의미로서 밑에-서다 란 뜻이었고, 기원. . 실재를 나타냈었으나 점차 위격과 책임있는 존재라는 의미를 갖게 되었다. Ousiaειμι(essere) 란 말에서 유래된 것으로 실재를 이루는 본질(essentia)을 의미하는 것이었으나, 두가지 개념으로 혼용되어 본질과 본성을 나타내는데 쓰이기도 하였고 한편으로는 Persona라는 의미로도 사용되고 있었다.
니체아에서는 ousia hypostasis 를 동의어로 사용하였다.: 따라서 교부들은 말씀은 성부와 함께 영원하시고 창조되지 않았으며, 성부와 같은 ousiahypostasis 를 갖고 있다고 장황하게 가르치고 있었다. 서구에서는 위의 두 단어 모두가 아직도 본질과 본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사용되고 있었고, 동방에서는 이 두 단어의 의미를 구별하기 시작하여, hypostasis persona를 의미하고 ousia natura substantia 를 뜻하는 용어로 정착되어 갔다. 따라서 이같은 언어의 혼란으로 동방인들이 3(hypostases)를 말할때면 구별된 세분의 신성을 말하는 것으로 오해될 수 있었다(3신론). 한편 서구인들이 하느님의 유일한 본체(Substantia)를 이야기 할 때면 동방인들에게는 위격적으로 특징이 구별되어지지 않은 하느님의 유일한 실체(Essentia)로 이해하게 되었다(유주론). 달리 말해서 동방인들은 여기저기에 흔적을 남기고 있는 양태적 유주론에 대해 깊은 혐오감을 갖고 있었으므로 homoousios 란 용어가 ousia 란 용어와 혼동되어 양태론을 주장하려는 것으로 이해하고 달가워하지 않았다. 한마디로 서구인들은 consubstantialis 라는 용어를 사용하면서 persona 와는 아무런 혼동을 일으키지 않았으나, 동방인들은 두 용어를 혼동하여 사용하는 경향이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서구인들은 (니체아 공의회가 결정한 신경을 옹호하는 니체아파로서) 신앙의 요약인 homoousios 를 변호하였고, 동방인들은 이 용어를 버리고 다른 용어를 사용하려 함으로써 서구인들은 반감을 자아냈던 것이다.
325년부터 381년 사이에 여러가지 타협안이 제시되었고, 여러 지역에서 지방공의회들이 열렸으나, 여기에서 이를 일일이 열거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아리안파와 아리안파는 국가의 후원을 얻게 되어 폭력에 의존하면서 명성있는 주교들을 박해하고 귀양을 보내었다. 이럴때면 항상 그렇듯이 영웅적인 고난이 있었는가 하면, 한편으로는 너무나 인간적인 면에 치우쳐 야합하는 일도 있었다. 특히 교황 리베리오의 굴복의 경우를 들수 있을 것이다. 이 시기에는 여러가지 신경형식들이 제시되었다. -- 정통교리를 수호하려는 의지는 있었지만, 의식적으로 homoousios 란 용어를 피하려는 경향이 있었고, 따라서 애매모호한 표현을 사용하였다.
 
이러한 혼란중에 발생한 의견들을 4가지 조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1). Homoousios 란 표현에 충실하면서 니체아 공의회의 신경을 옹호하는 니체아파는 모든 타협안을 거부하고 있고, 특히 알렉산드리아의 아타나시오 주교가 유명한 대표자이다. 때문에 아타나시오는 경찰의 추적을 받아 5회에 걸쳐 귀양을 갔으나, 신앙에 충실함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과거를 잊고 용서할 수 있는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그와 같은 동료로서 많은 업적을 남긴이들은 Poitiers Hilarius, Vercelli Eusebius, Antiochia Eustatius 등이다.
2). Anomoios 란 용어를 사용하며 니체아 파에 극단에 서서 반대를 표명하는 아리안파는 eunomiani anomei 라 불리우는 자들로서, Eunomius 를 대표로 하여 anomoios(dissimilis) 즉 비슷하지도 않다는 표현을 주장하였다. 말씀은 하나의 존재(essentia)이나 성부와는 전혀 다른 본질(속성, substantia) 을 갖고 있다고 한다. 이는 교회내적으로 볼때 하나의 파벌이라기 보다는 이단이었다. 보다 많은 사람들이 속하여 있던 중도파를 두가지 조류로 나눌 수 있는데,
3). 아리안파는 Homoios (similis) 란 용어를 사용하면서 -- 성자는 성부와 비슷하다. -- 아리안 파에 가까운 주장을 펴는 omeisti 들이 있었다. 이들은 성자가 성부와는 전혀 다른 substantia 를 갖고 있지만 성부의 의지에는 완전히 일치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4). 니체아파는 Homoiousios (similis) 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omeusiani라 불리우는 니체아 파에 가까운 이들로서 성자는 substantia 가 성부와 비슷하다고 주장하였다. 성자는 substatia 에서도 성부와 비슷하다. 모든 면에서 비슷하다.
 
이러한 주장들 가운데 마지막 그룹4은 비록 니체아 신경을 수용하는데 주저하고 있지만, 이전의 양태론적인 유주론의 용어였기에 배격할뿐 근본적으로는 니체아 신경에 동조하는 이들이었다. 그러므로 힐라리오는 용어상의 핑게를 대지말고 니체아 신경을 받아들이도록 촉구하면서 : “여러분들은 아리안파가 아닙니다. 그러면 왜 homoousios 란 용어를 피하여 아리안 파라는 인상을 주고 있습니까 ?”. (PL 10,541).라고 하였다.
아리안 파에서는 콘스탄틴 대제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정면으로 니체아 공의회의 결정사상을 공박할 용기가 없었으나, 공의회 수호자들을 상대로 많은 논전을 폈다. 특히 니코메디아의 에우세비오는 중요직책에 대한 야심가로서 귀양에서 풀려나 돌아온 335년에는 띠로에서 시노드를 열어 여러가지 모함으로(곡물 수송문제 등) 아타나시오를 파면시키기에 이르렀고, 아리우스마저(+ 336) 귀양에서 풀려나게하고 모호한 신앙고백으로 교회에 다시 받아들이게 하였다. 이리하여 니체아 공의회가 개최된지 10년후에는 사실상 공의회의 의미가 무산되고 말았다.
337년에 콘스탄틴 대제가 사망하면서 제국은 콘스탄틴 II(+ 340), 콘스탄스(+ 350), 콘스탄시오(+ 361) 3아들에게 분할되었고, Sardica(Sofia) 에서 열린 343년의 시노드에서 동.서의 주교들은 심각한 분열을 맞게 되었다. 신앙의 내용 때문에 서로 다른 시노드를 열어 서로 파문을 선언하였다.
아리아니즘에 동조하는 발렌스 황제(364-378)의 등장으로 아타나시오는 또다시 자기의 교구를 떠나야만 하는 박해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이 박해는 반니체아파(Homoiousios : Omeusiani)와 정통 니체아파의 결속을 가져오는 계기가 되었다. 이들은 모두 황제로부터 공격을 받게 되었고, 특히 3명의 카파도치아 주교들인 성 바실리오, 닛사의 그레고리오, 나지안의 그레고리오 등의 노력으로 하나의 본체와 세 위격 : mia ousia, treis hypostaseis ” 란 용어의 정립을 가져오게 되었다.
(콘스탄티노플 공의회) 발렌스 황제가 378년 코트인들과의 전투중 하드리아노폴리스에서 사망한 후, 새로운 황제가 된 테오도시오 황제는(379-395) 즉시 니체아 신경에 호의를 표명하였고, 모든 논쟁의 해결을 위하여 381년에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를 개최하게 하였다. 참석한 150명의 교부들은 반아리안파와 성령의 신성을 부정하는 Pneutomachi 들과 니체아 공의회 이후에 발생한 여러가지 오류들을 단죄하면서, 동질성(Consubstantialitas)3위의 구별과 말씀의 완전한 육화를 선언하였고, 니체아 신경의 재확인과 성령에 관한 부분을 채택하였다(주님이시요 생명을 주시는 성령을 믿나니, 성부에게 좇아 나시며, 성부와 성자와 더불어 같은 흠숭과 영광을 받으시며, 예언자를 통하여 말씀하셨나이다 : DS 150참조). 이와 더불어 콘스탄티노플의 주교를 로마 주교에 버금하는 영예의 직위로 인정하였다. -- 이와 같은 결정은 로마를 겨냥한 것이 아니라 안티오키아와 알렉산드리아를 겨냥한 것으로서 새로운 수도의 주교좌가 더 높은 권위를 지닌다는 사실을 천명한 것이었다. 이러한 주장은 이후 더욱 위험스러운 개념으로 증폭되어 1054년의 동서 대이교로 나타나게 된다.
 
아리아니즘은 교회에 큰 위기를 제공하였다. 교의적인 측면에서 보면,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정하여 구원의 가치를 약화시켰고, 부수적으로 인간의 신성화 가능성을 무력화시켰다. 실천적인 측면에서는, 교회의 자율성을 박탈하여 정권의 도구로 전락시키는 경향이 나타나게 되었다. 신자들 역시 이 논쟁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나지안의 그레고리오의 표현을 빌리면 : “콘스탄티노플의 빵가게에 물건을 사러 가면, 주인은 빵 값보다는 성부가 성자보다 우월하다는 주장을 편다. 사는 사람은 이에 반발하여, 성자께서도 영원한 분이며 다만 낳음을 받으셨다고 주장하면서, 빵 값은 생각하지도 않는다. 목욕탕엘 가도, 주인은 성자께서 어떻게 무로부터 나왔는지를 증명하라고 우겨댄다.”. 예술에서도, 민중의 의견이 반영되고 있는데, 동방에서는 자주, 알렉산드리아의 베드로 대주교를 그리스도 앞에서 옷을 벗고 떨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하고 있다. “누가 너의 옷을 벗겨갔느냐 ? 무례한 아리우스가 벗겨갔습니다. 생명을 유지하려면 아리우스에게 소리를 쳐야겠군...”
 
로마제국 내에서는 로마의 영향으로 아리아니즘이 극복되었으나, 고트족과 그밖의 이민족들 사이에서는 반아리아니즘 형태가 유포되어 시초부터 그리스도교를 아리아니즘의 형태로 수용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동고트족, 비시고트족, 반달족, 브르군디족들은 아리아니즘을 받아들임으로써, 로마제국의 타민족들과의 융합이 더디게 되었고, 로마제국과의 결속을 약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함으로써 이슬람세력에 의한 정복을 손쉽게 만들어 놓았다.
 
2). 그리스도론 논쟁
 
(1).라오디체아의 Apollinarius, Nestorius 와 에페소 공의회
니체아NI-CO-E-CA-CO-CO-NI-CO콘스탄티노플 공의회 순서!
성자의 Una Persona, Duae Naturae(Divinitas & Humanitas)/한 몸에 두 머리?
알렉산드리아 학파 = 일치 & 혼합 : 안티오키아 학파 = 구별(말씀+인간)
 
*< Augustinus 의 은총논쟁과 뻴라지오 >
 
410년 알라릭의 로마 약탈후, 뻴라지오는 아프리카의 카르타고로 건너왔고, 그곳에 첼레스티오를 남겨둔채 다시 빨레스틴으로 떠나갔다. 첼레스티오는 카르타고에서 사제서품을 청원하였으나, 이태리에서부터 그를 잘 알고 있던 사람에 의하여 이단자로 고발됨으로써 411년의 카르타고 시노드에서 파문을 받게 되었고, 여기에 아우구스티노가 개입하게 되었다. 단죄의 내용은 : “ 아담은 본래 (원죄와 관계없이) 죽을 인간으로 창조되었다. 아담의 원죄는 그 자신에게만 해당될 뿐 전 인류에게는 해를 끼치지 않는다. 인간은 원하기만 한다면 죄 없이도 살 수가 있다. 어린이들은 세례를 받지 않아도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가 있다. 세례를 받은 부자가 모든 재산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파문을 받은 첼레스티오는 에페소로 도망하여 거기에서 서품되었고, 한편 뻴라지오는 예루살렘에서 인기를 얻으며 자신의 교리를 선포하고 있었다.
이리하여 아우구스티노는 412-415년에 반 뻴라지오적인 저술활동을 벌이게 되는데, “ De peccatorum meritis et remissione et de baptismo parvulorum: 죄의 벌과 사함, 그리고 어린이의 세례에 관하여 란 작품에서 원죄는 모든 사람에게 전달됨을 말하고 있고, 실제로 원죄에 물들어 있음을 논하였다. “ De spiritu et littera ” 에서는 은총이 우리 의지의 내적 성화에 작용하고 있음을, “De natura et gratia” 에서는 뻴라지오의 본성이란 저술을 반박하면서 인간에게 절대적으로 은총이 필요함을 주장하고 있으며, 인간이 원죄로 말미암아 본래의 무죄성과 힘을 잃게 되었음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고 나서 은총은 인간의 선행과는 관계없이 완전히 거저 주어진다고 강조하였다 (non meritis sed gratis).
 
8장 수도원의 기원과 발전
 
박해시대에는 신자들이 순교를 그리스도를 닮고 영광에로 나아가는 최대의 은총으로 생각하였다. 이 시대에는 모든 신자들이 이러한 은총을 갈망할 수 있었고, 또한 기쁘게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었을 만큼 교회는 항상 위험에 처해 있었다. 오리제네스의 말대로 (예레미아서 강론 4,3)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부터 순교가 우리의 문을 두드리고 있던 시대였다”.
그러나 콘스탄틴 대제 이후부터는 교회에 대한 관용정책이 시행되었을 뿐만 아니라, 세속 권력의 비호를 받는 특권까지 누리는 상황으로 바뀌었다. 백성들이 집단으로 개종하게 됨에 따라 신자들의 신앙은 때로는 피상적인 상태에 머물게 되었다. 높은 직책에 있는 사람들은 개인적인 확신에 의해서가 아니라 황제의 눈치를 살피며 신자들이 되었다(: 사단장과 참모들). 많은 성직자들이 공직에 등용되었고, 또한 많은 주교들이 하느님께 대한 관심보다는 공권력을 탐하게 되었다. 예로니모 성인은 말하기를(Vita S. Malchi, in PL 23,55b), “신자 황제들이 등장한 이후 교회는 재산과 세력 면에서는 성장하였으나 도덕상으로는 쇠퇴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1. 수도생활의 기원과 성격(Monasticism, Monachism)
 
1). 세상을 피함
이와 같은 상황에서 완덕에 이르는 가장 편리한 길이야말로 세상에서부터 도피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예로니모 성인은 하느님께 대한 사랑으로 고독과 금욕, 명상을 실천하는 생활, 세속생활의 포기와 절제라는 일상의 순교를 사실상의 순교와 동일시하게 되었다. 수도자들의 이같은 이상은 인간의 숭고한 욕구와 일치되고 있다 : 가장 필요한 것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하는데, 수도생활 속에는 바로 모든 것의 주인이신 하느님이 계시는 것이다. 이렇듯이 그리스도교는 그리스도를 따라 역사의 큰 주류를 이루게 될 은수자들의 생활을 완성시키게 되었다. (은수자 Monacus 는 희랍어의 Monos 에서 온 말로서 하느님과 함께 홀로 지내는 것을 의미한다).
 
 
 
2편 중세교회
 
1. 북부 유럽민족들에 대한 선교와 동.서 교회의 분열
 
5-10세기는 고대의 로마-비잔틴적인 교회에서 중세의 봉건적인 교회가 형성되는 시기이다. 교회는 대교부들의 시대를 지내고 나서, 오랫동안 빛을 밝혀줄 위인들을 만나지 못하였다. 사실상 이같은 겨울의 동면기는 결실기 이후에 오는 것으로서, 그렇다고 모든 것이 죽었던, 소위 암흑기는 아니었다. - 겨울은 힘을 비축하고 다가오는 봄을 맞기 위해 양분을 배양하는 기간인 것이다. - 따라서 이 시기도 새로운 생명력이 용솟음 쳤던 시기이다.
고대와 현대의 중간시기인 중세는 흔히 5세기부터 15세기의 문예부흥기까지를 일컫고 있다. 이 시기는 희랍-로마의 문화와 게르만 민족들의 전통, 그리고 그리스도교 사상이라는 세 가지 요소로 형성된 시기였다. 그리스도교는 점차적으로 사상과 제도 속으로 침투하여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었고, 복음적 이상에 따라 사회의 모형을 갖추어 나갔다. 따라서 교회의 영향력이 점점 강하게 나타나게 되었고, 그리스도교적인 일치에 중점을 두었으나 타협도 없지는 않았다.
그리스도교 사회를 형성하는 중세기의 세 가지 특징을 열거할 수 있는데, 소위 야만족이라 일컫는 이민족들이 수도자들과 교황청의 노력으로 5-10세기에 걸쳐 개종하였다는 사실과, 교황령이 확보되는 시기이며(7-13세기), 중동지역의 그리스도교가 서구의 교회와 점차적으로 분리되는 시기(9-11세기)였다.
 
1. 북방민족의 개종과 복음화(김성태,291-335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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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십자군 운동
 
 
V. 동서 교회의 분열(1054, 프란쯘, 217-219; Martina, 181)
 
1. 희랍교회의 성격과 분열 원인
 
희랍교회는 적어도 6세기경부터 여러 세기를 거치는 동안 서구로부터 점점 멀어져가며 자신의 길을 가고 있었다. 이같은 분열의 주요 원인은 무엇보다도 민족적인 성격의 차이에 있었다. 희랍인들은 이론을 중시하고 지적인 면에서 우월감을 가지고 있었으며, 세밀한 면이 보이는 반면에 반 자연적인 악습에는 느슨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그러나 라틴인들은 실천적이고 적극적이었으며, 법을 중시하고(유스티니안 법전은 동방에서 성안되었고, 12세기 법률가들에 의하여 재발견되었음을 간과해서는 안되지만) 희랍인보다는 더 온건하고 도덕적인 측면에서 우위에 있었다.
희랍인들은 로마인들을 야만인으로 경멸한 반면에, 라틴인들은 희랍인의 그 오만함을 경멸하고 있었다. 희랍인은 근본적으로 그들의 생활과는 달리 염세적이었으므로 세상으로부터의 도피와 관상에 몰두하는 종교적 심성을 간직하면서 그리스도교의 쇄신을 위해 노력하였다. 물론 이와같이 대칭적인 면을 부각시킨다는 것은 위험한 역사관이다. 희랍인의 악습이 로마인에게서도 발견될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두 민족간의 성격이나 경향이 심한 편차를 보이고 있다는 점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이같은 성격상의 차이만으로 인하여 분열에 도달하였다고 보기는 어렵고, 정치적인 복합성이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언어의 차이는 심화되었고, 상호 몰이해를 낳게 하였다. 로마에서는 희랍어를 더이상 공부하지 않게 되었고, 콘스탄티노플에서도 라틴어를 이해하지 못하게 되었다. 성 그레고리오 대교황은(590-604) 비잔틴 수도에 오래 거주할 당시에도 희랍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여러 가지 차이점은 교회의 예식과 규범에서도 나타났다. 서구교회는 독일법의 영향을 받고 있었고, 유스티니안 법은 칼 대제의 참사원에게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반면에 동방교회에서는 독일법을 모르고 있었고, 교황의 법령들이 널리 시행되지 않고 있었다. 그밖에도 축일, 재계일, 교회의 복장, 혼인법 등에서 차이를 보이게 되었다.(희랍인들은 특수한 경우 외에는 재혼을 금지한 반면에 로마인들은 이를 허락하고 있었다).
동방의 신학은 그리스도론 분쟁의 여파로 급격한 발전을 이루었었으나, 6-7세기에 이르러서는 경직화되었다. 새로운 형태의 교리나 생활의 구조적인 발전이 이루어지지 못하였고, 개인의 의견을 질식시키는 옛 구조의 보존에 머물러 있었다. 이와는 달리 서구의 신학사상은 발전이 느리기는 하였어도 계속되는 발전에 항상 문호를 개방하고 있었다.
교황의 수위권에 대해서도 동방교회에서는 이를 긍정하고 있었지만, 명확하게 그 성격을 규정하지 않고 있었고, 오직 명예적인 수위권에만 국한시키면서 지역교회의 문제에 개입하려는 로마의 요구를 단호히 거부하고 있었다. 전체교회의 무류성은 인정하나 로마 교황의 무류성은 인정하지 않았으며, 중앙집권화는 교회법과 전통에 위배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미 6세기에 인식되었고, 9세기의 발전을 거쳐 11세기에 성문화된 교회의 최고권위란 학설은 5개의 총주교좌에 (로마, 콘스탄티노플,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 예루살렘) 공동으로 존재한다는 Pentarchia 학설이었다.
 
 
 
2. 성상화 논쟁(Iconoclastia) -cf. 만천유고 중의 십계명가/꼭두각시 나무신막.
=다마스코의 요한 / 그리스도의 육화로 인해 예수의 성상화 표현 가능!
성상화 공경 논쟁은 동.서 지역간의 투쟁으로는 볼 수 없고, 희랍교회 내의 투쟁으로서 교회가 국가의 개입에 반대하여 독립성을 유지하려는 적극적인 노력의 일환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논쟁은 비잔틴과 로마교회의 결별에 한 계기가 되었고, 정통교리를 보호하려는 로마의 노력에 대하여 동방의 여러 황제들이 압력을 가함으로써 프랑크족에게 도움을 청하게 만들었다.
 
(Latria: 흠숭, Dulia : 공경) 서구의 황제 칼은 공의회 회의록에 대한 왜곡된 해석과 (공경이라는 단어를 흠숭이라는 의미로 이해함) 개인적인 완고함으로 인하여 제 2차 니체아 공의회의 결정을 받아들이지 않고, 성화를 파괴해서도 안 되지만 흠숭하거나 공경해서도 안 된다는 이유로 754년의 결정뿐만 아니라 787년의 결정도 부인하는 일련의 비판을 Libiri Carolini에 전개시키도록 하였다. 그는 하드리아노 1세 교황의 반대회신에도 불구하고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린 시노드에서 Libri Carolini 의 내용을 승인하였고, 교황은 문제의 확대를 피하기 위하여 이를 묵인하게 되었다.
레오 5세 황제의 출현으로 성상화 파괴운동은 또다시 절정에 달하게 되었다. 황제는 성상화 공경에 반대하는 754년의 결정들을 다시 재현하였고, 또다시 박해와 귀양이 30년 이상 지속되었다. 역사적인 대칭현상으로서 다시 한 번 테오도라 황후가 미카엘 3(842-867)의 섭정을 하게 됨으로써 논쟁을 되돌려 놓았고, 성상화에 대한 정통적인 축일이 제정되었다.
성상화 파괴론에 대한 정통교리의 승리는 오랫동안 논의되어 왔던 진리의 확인이었다는 의미뿐만 아니라, 성화예술과 유해공경의 정당성을 규명하고 전례의 새로운 발전기를 맞게 하였다는 의미를 지닌다. 이후 수도자들의 위치는 격상되었고, 따라서 동방교회에서는 부동의 세력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수도원 출신의 많은 주교들이 나오게 되었고, 성상화에 대한 신심이 증가하였으나, 아주 보수적인 입장으로 흘러 신앙에 대한 논의마저 이루어 지지 못하게 하였다. 그러나 국가로부터 교회의 독립성을 유지하려는 노력이 용기 있게 나타났고, 효과도 있어서 9세기부터는 교회에도 숨통이 트이게 되었다. 그렇지만 성상화 논쟁에 관한 교황과 동로마 황제간의 긴 논란은 교황청과 프랑크족간의 연합을 가속화시켰고, 이로써 희랍인과 라틴인들의 성격 차이로 수세기 동안 벌어져 왔던 감정의 간극이 더욱 깊이 패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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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1054년의 분리(이교)
 
.서 교회 사이의 불신은 이후 교황들이 이태리 남부지방에(Puglia, Calabria) 대해 비잔틴의 지배를 계속하여 반대하는 과정에서 심화되어갔다. 콘스탄티노플 교회는 로마의 정책에 깊은 불만을 품게 되었고, 10세기 초 총주교의 권한이 강화되면서 불가리아 교회에 대한 관할권을 강화하고, 러시아의 신생 교회에 대해서도 영향력을 확대하는 등 서구 교회를 견제하게 되었다. 마침 크레타 섬과 안티오키아 교회를 이슬람의 지배로부터 해방시키게 되었다. 이렇듯 세력이 강화된 11세기 초에 콘스탄티노플의 총주교들은 남부 이태리에 대한 교황들의 정책에 반대하는 표시로서 전례기도 명단에서 교황을 위한 기도를 삭제하기까지 하였다. 그렇더라도 1040년경의 상황은 비교적 정상적인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결론적으로 동방교회는 그리스도교회에 있어 빈약하고 저질적인 제 2급의 교회가 아니라, 오히려 오랫동안 서구교회의 스승이었던 교회이다. 가톨릭 교회는 먼저 동방의 지중해 연안에서 발전되었고(3세기 말까지 그리스도교의 2/3 지역이 동방에 편중되어 있었다), 계시의 내용을 희랍문화의 형태로 발전시키고, 대 사상가들과 금욕 수도자들, 신심가들을 배출한 교회가 바로 동방교회였던 것이다. 서구는 오랫동안 희랍-비잔틴 학파의 영향을 받았고, 따라서 오늘에도 동방교회와의 긴밀한 접촉을 통해 더욱 부요해질 수 있는 것이다. 오늘에 이르러 별로 관심을 쏟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고대의 문화와 가치를 회복시키는데 큰 도움을 줄 수 있는 교회가 바로 동방교회인 것이다.
(P.455) 교황 바울로 6세와 콘스탄티노플의 총주교 Atenagoras 의 역사적인 만남 : 1964년 예루살렘에서 + 로마에서 켄터베리의 주교 Ramsey와의 만남, 1967.10.26 로마에서 바울로 6세와 Atenagoras 의 재회가 이루어짐. ** 동구권 교회= 속박 // 서구교회= 무기력 .... 조화의 필요성
 
 
VI. 가톨릭의 개혁 (반 종교개혁)
 
1. 용어의 정립(가톨릭 개혁, Riforma Cattolica : 반 종교개혁, Controriforma).
 
1500년대의 교회사는 가톨릭의 개혁 혹은 반 종교개혁이란 문제와 깊은 관련을 맺고있다. 16세기에 교회에 나타난 쇄신운동들이 이제까지 진행되어왔던 의지의 결과이냐 아니면 프로테스탄트 개혁에 대한 저항에서 나온 것이냐가 우선 문제가 되는 것이다. 연대적으로 볼 때 루터의 개혁 이후에 비로소 일어난 운동이었던가, 아니면 1517년 이전부터 이미 진행되어 온 교회내의 자발적인 운동의 결과이었는가?
 
첫째 견해는 루터의 개혁에 대한 반대운동으로 일어났다고 보는 견해이다. 여기에서는 1517년 이전에 쇄신운동의 기미를 전혀 찾아볼 수 없다고 한다. 둘째 견해는 이에 반대하는 이태리, 독일, 프랑스 연구가들의 견해로서, 1400년대부터 이미 종교적인 쇄신운동이 진행되어 왔다고 본다(Jansen, Pastor, Tacchi Venturi). 따라서 가톨릭의 개혁은 루터의 출현과는 상관없이 자발적으로 진행되어 왔던 것이다. 비록 성공하지는 못하였어도 제 5차 라테란 공의회(1513-1517)의 개혁 의지가 이를 입증한다는 것이다.
비교적 균형있는 판단을 내리고 있는 3의 견해H.Jedin 을 비롯한 현대 역사가들의 견해로서, 루터 이전에 이미 가톨릭 교회내에 자발적인 쇄신운동이 일어나고 있었으나, 그 결과는 미미한 것이었고, 완전한 개혁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로마 교황청 관계자들은 사건의 심각성을 느끼지 못하고 부패한 생활을 하면서 교회쇄신을 오히려 방해하고 있었다. 교황들은 족벌주의적인 정치와 공의회의 개최에 대해 두려움을 갖고 있었다. 수많은 대중이 무리를 지어 루터를 추종하여 교회를 위협하게 되자 비로소 개혁에 손을 대게 되었다. 결국 교회의 쇄신운동은 저변으로부터 자발적으로 이미 일어나고 있었으나, 로마 당국에서는 위기를 느낀 다음에야 비로소 점차 각성을 하게 되었다고 본다. 따라서 예딘은 가톨릭의 개혁과 반종교개혁이란 용어를 동시에 사용하고 있다. 가톨릭의 개혁은 트렌토 공의회 이전부터 저변에서 자발적으로 일어나고 있었고, 반종교개혁은 고위층의 주도하에 바울로 3(1534-1549)와 트렌토 공의회를 통해 일어났다고 본다.
 
그렇다고 너무 부정적인 시각으로 시대 상황을 무시하는 오류를 범해서는 안된다. 현재의 발전된 모습은 이전 시대의 디딤돌에 의하여 가능하게 되었다는 사실에 유념해야 하는 것이다. 모든 한계와 장애에도 불구하고 트렌토 공의회 이후의 교회는 역사적으로 볼 때 긍정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고 볼 수 있다.
 
** 1500 = 개혁과 쇄신
1600 = 얀세니즘
1700 = 계몽주의
1800 = 프랑스 혁명, 자유주의 - Syllabus, I Vatican 공의회
1900 = 산업사회 - 노동회칙, 근대주의(Modernism), II Vatican
2000 = ?
 
. 선교의 문제점(cf. Martina, 323)
 
1. 포르튜갈, 스페인, 영국의 식민지 정책
 
포르튜갈은 세력이 약하였기 때문에 아시아 내륙 깊숙히 침투할 의향을 지니지 않았었고, 다만 상업의 전진기지를 건설하는 정략적인 입장을 취하였다. 이들은 원하던 상품이 모아지게 되면 함선을 동원하여 매년 본국으로 실어 날랐다. 이같은 상황에서는 이들이 인도와 말레이시아에 대하여 사회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었고, 따라서 이 지방들은 유럽사회에 잘 알려지지 않았다.
스페인은 라틴 아메리카 내륙 깊숫히 침투하면서 조직적으로 활동하였다. 교육사업에도 신경을 써서, 유럽의 제도와 풍습을 새로운 대륙에 단순히 수출하는데 그치지 않고, 3의 새로운 사회로서 라틴 아메리카가 출현하게 만들었다. 당시 세계적인 추세였던 이런 작업은 긍정적인 측면도 없지 않았으나, 십자가에 암영을 드리우는 큰 실책도 뒤따랐다.
스페인 지배하의 원주민 상태는 앙글로 색슨족과 접촉하게 된 북미의 인디안들 보다는 상태가 나았다. 영국인들에게서는 인종차별이 극심하였으나, 스페인 정복자들은 그보다는 심하지 않았다. 이는 영국인들이 전가족을 대동하고 이민을 온 반면에, 스페인인들은 동족의 여인들을 데리고 오지 않았던 때문이다. 이같은 상황은 한편으로 도덕상의 심각한 문제를 일으키기도 하였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두 종족간의 혼합이 쉽사리 폭넓게 이루어지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스페인 정복자들은 두가지의 상반된 목적을 따라 움직였다. 하나는, 쉽고 빠른 방법으로 재산을 획득하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비록 여과되지는 않았지만 원주민의 구원에 대해서도 진지한 열성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원주민에 대한 복음화는 시초부터 강압적인 방법에 자주 의존하였고, 회개라는 말 자체가 어떠한 정치체제에 예속되는 것과 자주 혼동되었다. 그러나 어느정도 시간이 흐르고 난 다음에 새로운 환경에서 자라난 제 2의 세대에 이르러서는 효과적인 교리교육의 결과로 비록 피상적인 면이 없지 않았으나 사실상 신자들이 양산되었다. 이같은 사실에 대하여 역사적 비판도 가해지고 있다 - 가톨릭 학자들은 정복이라는 차원에서 발생한 강제성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 결과마저 너무 단죄하여서는 안 된다고 본다. 한편 평신도 사가들과 일부 가톨릭 사가들 사이에서도 오늘의 라틴 아메리카 교회가 안고있는 모든 결함들이 바로 이러한 원인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보는 견해를 가지고 있다.
하여튼 스페인인들이 도착한 곳에서는 가톨릭 국가들이 형성되었는데, 아메리카뿐만 아니라 아시아 지역의 유일한 가톨릭 국가인 필리핀이 그 대표적인 가톨릭 국가의 예이다. 필리핀은 칼 5세 황제의 아들이며 영국의 메리 여왕의 남편인 필립 2(+ 1598) 이름에서 유래되었으며, Escurial 궁궐에서 세밀한 사항까지 원격조정을 실시하였다.
당시의 정치.경제적인 상황은 스페인 식민지에서 봉건제도를 실시하게 하였다. 2세대에서 3세대까지 정복자들은 원주민들을 이용하여 착취한 재화를 본국으로 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이 제도는 즉시 중대한 권력의 남용을 유발하였다. 정복자들은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하여 아메리카의 인디오들을 수탈함으로써 급격한 사망률을 초래하였다. 1582년에 스페인 정부에 보고된 내용을 보면 안티오키아의 토착민이 50년 사이에 10만명에서 800명으로 줄어들고 있다. 열악한 조건들이 이러한 사망률을 초래하였던 것이다.
영국인들 역시 스페인처럼 대륙내부로의 침투를 강행하였다. 상업 전진기지만을 설치한 것이 아니라, 스페인보다 더 강압적인 방법으로 원주민을 대하였고 관계의 정상화를 시도하지 않았다. 저항하는 원주민들을 포악하고도 효과적인 방법으로 멸종시키려 하였다 (알콜, 마약, 사살 등). 따라서 북 아메리카에서는 특유한 제 3의 새로운 사회가 이룩될 수 없었고, 오직 유럽의 풍습과 전통만이 그대로 유입되었다. 아메리카 대륙의 인구는 2/3세대를 거치면서 90%가 감소되어 1억명의 인구가 1천만명이 될 정도로 감소되었다.
 
 
2. 교회 보호권 및 교직 임명권(Patronato)
 
1400년대 중반부터 1600년대까지의 교황 니콜라오 5(1447-1455)부터 바울로 5(1605-1621)는 스페인과 포르튜갈의 국왕들에게 새로운 세계의 복음화를 촉진시키는 조건으로 새로운 특권을 부여하였다. 당시의 정신적 상황으로서는 아시아와 아메리카의 복음전파를 위하여 확실하고도 효과적인 방법이 바로 정치권력으로부터 후원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그밖에도 새로운 세계를 정복한다는 것은 이슬람의 세력으로부터 이베리아 반도를 탈환했던 것과 같이 근원적으로 거룩한 작전의 일환으로 생각되었다. 이같은 구조는 당시의 일반적 상황이나 정신으로 볼 때 절대군주 체제하에서 교회와 국가가 밀접한 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던 것과 상응하는 것이었다. 종교와 사회의 밀접한 관계는 커다란 이익을 줌과 동시에 큰 모험이 따르는 것이었다.
이상과 같이 스페인과 포르튜갈의 군주들에게 일정한 권리와 의무가 주어져 있어 비신자들에 대한 복음화의 과제가 국가의 숙제가 됨으로써, 국가는 선교지방의 교회에 대하여 큰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국가의 특권으로, 1). 모든 교계의 직책에 대한 임명권, 2). 국가원수의 재량에 따라서 선교사들을 받아들이거나 추방시킬 수 있는 권한이 주어졌다. 이같은 조건하에서 선교사들은 Lisbon 이나 Cadix 에서 출발하게 되었다. 선교사들은 국왕의 동의가 없는 한 선교사로 출발할 수도 없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포르튜갈에서는 외국인 선교사들의 유입을 달가워하지 않게 되었으나, 스페인에서는 그래도 비교적 쉬운 편이었다. ( 1700년대에는 라틴 아메리카에 파견된 선교사들 중 예수회 선교사들의 4/5 가 독일인들이었다.)
국가는 여타의 세력을 배제하면서 모든 교회의 문제까지 통솔하게 되었고, 선교사들 역시 국가의 기관을 통해서만 로마와 관련을 맺을 수 있었다. 포교성성은 스페인과 포르튜갈의 식민지에서 어떠한 권한도 행사할 수 없게 된 것이다.
물론 국가의 특권이 행사되기 위해서는 그에 상응하는 의무도 수반되었다. 선교사를 선발하여 파견할 의무와 선교사들에 대한 필요경비를 조달하는 의무가 부과되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국가의 권력은 유럽에서보다 아메리카와 아시아 지역에서 월등한 권한을 행사하게 되었다. 경비를 조달하는 자가 모든 권한을 손에 넣게 되었고, 도움을 받고 있는 선교사들은 좋건 싫건 간에 국가에 복종을 해야 했다.
이같은 선교보호권은 긍정적인 면도 없지 않아, 신앙의 전파를 촉진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선교의 장애물을 제거하고, 필요한 물자를 지원하고, 선교사들을 보호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시초부터 부정적인 측면도 간과할 수 없었다. 교회를 사회세력이 통제하게 되어 성청과의 직접적인 연락이 끊기게 되었고, 필요한 선교사들의 파견을 방해하는 사례도 나타나게 되었다. 결국 종교적 후원을 위하여 시작되었던 선교보호권이 점차 자국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한 도구로 변질되었고, 정치적으로 다른 세력의 영향을 배제하려는데 이용되고 말았다. 이러한 보호권은 1928 - 1950년 사이의 긴 타협끝에 종결되고 말았다.
 
3. 인디안과 흑인 문제 (영화 미씨언 참조)

첨부파일1 : 2017114118383396.hwp
Writer : 김학렬 신부   Date. 2017-11-04 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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