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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韓民族)의 由來와 天主恭敬 思想의 내력(來歷) - 배달겨례 천주교회 창립사 발췌 연재 (1)
韓國天主敎會 創立聖祖 五位
平信徒 殉敎者들의 自發的인 信仰史 略傳
Ioannes Baptista 李檗 (1754~1785)
Petrus 李承薰 (1756~1801)
Franciscus Xaverius 權日身 (1742~1792)
Ambrosius 權哲身 (1736~1801)
Augustinus 丁若鍾 (1760~1801)
<일부 발췌 연재>
한국천주교회 창립선조 5위
평신도 순교자들의 자발적인 信仰史 略傳 -①-
 
서론.
 
복자(福者), 교황 요한바오로 2세께서는 1984년 봄 한국을 방문하시어, 5월 6일에 서울에서 103위 한국 순교복자들을 시성(諡聖)하셨고, 같은 해 10월 14일 주일에는 로마 사도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거행된 한국 순교 성인 103위 첫 번째 축일 대미사 강론을 통하여, "한국인들은 선교사가 한국에 오기 전에 자발적으로 진리를 탐구하고 신앙을 실천하여 교회를 세웠으니, 이는 세계 교회사에 유일한 경우"라고 말씀하신 후, 한국의 저 평신도들을, 마땅히 "한국천주교회 창립자들"로 여겨야 한다고 언명하셨다.
 
그 후 1989년 두 번째로 한국을 방문하시어 국제 성체대회를 집전하시고 가신 후, 1993년 9월 21일, 천진암 성지 100년계획 천진암대성당 정초식에 당시 주한 교황대사 John Blaitis 대주교를 통하여 보내주신 교황 공식 문헌의 머릿돌 교황 강복문(降福文)에서, ‘천진암 성지를 한국천주교회 탄생지(發祥地)’라고 言明하셨다. 그런데 전 세계에 순교 성지는 많지만, 천주교회 발상지가 있는 나라는, 베들레헴 성지가 있는 이스라엘과, 천진암 성지가 있는 대한민국, 두 나라 뿐이다. 天上으로부터 천주 성자의 강생으로 인류구원의 천주교회가 시작된 聖地 이스라엘과, 이와는 달리, 우리나라는 地上에서, 한국인들이 천주교 신자가 되기 전에 非信者들의 신분으로, 마치 동방박사들처럼, 자발적으로 眞理의 빛을 찾아 천주교회를 연구하여 알고 신봉하기 시작하였다.
 
한국 천주교회의 자발적인 이 특이한 교회 창립사와 신앙정신은 오늘날에까지 계승되어, 한국 교회 발전의 뿌리와 줄기와 힘이 되고 있다. 이제 우리는 천주교회의 품 안에 들어와, 하느님의 백성이 되었으니, 우리나라 천주교회 발전을 위해서뿐 아니라, 전 세계 교회의 발전에도 힘껏 이바지하기 위하여, 그 옛날의 한국처럼, 아직 복음이 충분히 보급되지 않은 나라의 非信者 형제들을 위하여, 한국천주교회 창립사를 바르게 알고 지키며 가꾸어 나가야 하며, 또한 이 은총의 교회역사를 온 세계 만민들에게 알려서, 저들에게 한국천주교회 창립성조들이 본보기가 되도록 힘써야 하겠다.
 
세계 만민의 구원을 원하시는 하느님의 자비로우신 섭리가 우리 한민족을 天主의 眞理로 비추어 주시고, 구원의 교회로 인도하여 주신, 그 기묘한 내력을 우리 모두가 보다 폭넓고 깊히 있게 이해하며, 하느님께서 우리 선조들에게 베푸신 주님의 은총에 감사드리고, 또 나아가 우리 신앙선조들의 그 정신과 덕행과 교훈과 모범을 본받아, 우리 모두가 신앙의 선조들을 닮아가며 몸받기 위하여, 간결하게나마 한국천주교회 창립성조 5位 평신도 순교자 신앙인들의 略史를 추려서 함께 알아보고자 한다.
 
그런데 한국천주교회의 기묘한 창립이 우연히, 갑자기 돌출된 사건이 아니라, 하느님의 섭리와 은총으로, 머나먼 옛날부터 하느님께서 우리 선조들에게 베풀어주신 종교적 자질과 신앙문화의 터전을 되돌아보므로 인하여, 진리의 움을 틔우고, 신앙의 싹이 돋아 자라게 한, 우리 민족의 정신적 바탕을 먼저 이해하고 염두에 두면서, 우리나라 천주교회의 창립사를 읽어야만 우리가 이를 보다 쉽게 알아들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세계 모든 민족들이 선사시대부터 모두 각기 자기들 나름의 종교적 문화나 관습을 가지고 있었듯이, 우리겨레도 예외는 아니었으나, 우리 겨레가 머나먼 옛날부터 다른 민족들의 종교 신앙사와 좀 다르다고 할만한 독특하고 월등한 종교적 대상을 신앙하는, 天主思想을 가지고 살아나온 흔적과 체취가 韓國上古史를 연구한 非信者 考古學者들에 의하여 이미 많이 밝혀져 왔고, 또 오늘에까지 우리의 생활과 정신문화 속에 전승되고 있어서, 이를 먼저 이해하기 위하여, 아주 간결하게라도 우리 겨레의 내력을 살펴보고 들어가기로 하자.
 
1. 한민족(韓民族)의 由來와 天主恭敬 思想의 내력(來歷)
 
우리 배달겨레에 대한 하느님의 섭리와 우리 민족 天主恭敬 思想의 내력을 먼저 살펴보면, 하느님은 우리 배달겨레에게 천주신앙의 정신적인 남다른 자질을 특은으로 주셨으니, 우리겨레는 예로부터 자신들을, 밝은 겨레, 배달겨레, 밝달 민족, 빛의 아들들, 힌옷을 즐겨 입는 민족, 白衣民族, 天神族, 혹은 天孫族. 등으로 부르면서, 자신들은, ‘하느님의 겨레’로 알고, 믿고, 하느님께 天祭를 올리며 살아왔다. 그리하여 먼 옛날부터 늘 하느님을 최고의 唯一神으로 위하며 모시고 살아왔고, 또 하느님께서는 우리겨레와 늘 함께 계신다는 신념을 가졌으며, 늘 우리겨레를 보살펴주신다는 굳은 신앙을 가지고, 기도하고 제사를 올리며 오늘날까지 오랜 세월을 살아 내려왔으니, 사실 우리는 영원히 ‘하느님의 겨레’다.
 
이러한 신념은 신구약 성경의 말씀이며 가르침이기도 하다. "하느님의 아들들아, 너희는 주님께 영광과 권능을 바치거라"(시편 28장). 베드로가 입을 열어 이렇게 말을 시작하였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차별대우하지 않으시고, 당신을 두려워하며 올바르게 사는 사람이면 어느 나라 사람이든지 다 받아 주신다는 사실을 나는 깨달았읍니다"(사도행전 10장 34절)
 
일찍이 먼 옛날, 우리겨레는 세계의 지붕이라고 부르는 파미르 고원과 우랄알타이 산맥과 天山 산맥이 걸쳐 있고 天池라고 부르는 호수가 있고, 만년설이 덮혀있는 높고 크고 신비스러운 여러 대소 산맥 봉우리들 중에, 漢文字로 표기되기 시작하기 전부터 오랜 세월을 두고 사람들이 불러왔고 지금도 부르고 있는, 배달봉(倍達峰), 박달봉(博達峰), 박격달봉(博格達峰), 등으로 불리는 天山 산맥 자락에서 살다가, 먼 옛날 해 돋는 나라 동쪽을 향하여 반만년이상 一萬年 내외의 오랜 세월을 두고 이곳 韓半島까지 민족이동을 하여 왔다.
 
지금 한반도 각처에서 발견되는 고인돌과 구석기, 신서기, 청동기 시대 유적을 보면 적어도 1만 5천년 전 후부터 이미 이 곳에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 그런데 우리 한반도가 몽고족에 속하는 우리겨레의 발원지는 아니며, 어디에선가 이리로 이동하여 온 것은 분명하므로, 우리 민족의 上古史가 밝혀주는 문화 흔적들을 되짚어 아시아 대륙을 東에서 西로 횡단하며 찾아가다 보면, 우리 겨레는 먼 옛날 지금의 天山 山脈 자락에서 살다가 아시아 대륙을 西에서 東으로 횡단하면서 오랜 세월을 두고 이리로 이동하여 온 것이 확실하다. 지형상으로도 천산 산맥에서 보면 서쪽과 북쪽과 남쪽이 모두 우랄산맥과 알타이 산맥, 곤륜산맥과 히말라야 산맥, 천산 산맥과 태산준령, 등으로 파밀 고원에 연결되어 막혀 있으나, 동쪽으로만은 중국의 한 복판을 서에서 동으로 가로 지르는 황하문명의 평야지대를 관통하며 한반도에까지 이르도록, 험산준령으로 막혀 있지 않고, 드넓게 극동까지 열려 있다.
 
다만 우리겨례의 민족이동 이유는, 주로 사냥을 하며 살던 先史時代부터 수렵하기 쉬운 곳을 찾아 나선 경제적인 목적이 아니었고, 그렇다고, 다른 민족들이 사는 곳을 점령하고 정복하기 위한 정치적인 목적도 아니었으며, 오로지 하늘에 떠서 지나가는 해를, 하느님의 얼굴, 하느님의 아들, 하느님으로 믿고, 모시고, 섬기며, 햇님이 거하며 다스리는 저 높은 하늘도 우러러 위하면서, 날마다 해가 떠오르는 동쪽으로 가면, 햇님의 나라, 맑고 밝은 ‘빛의 나라’, ‘빛 고을’이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우리 민족이 수 천년 내지 일만년 이상에 걸쳐 아시아 대륙을 西에서 東으로 횡단하면서, 깊고 넓은 많은 강물을 건느며, 높고 다소 험준한 큰 산맥들을 넘고 돌면서, 마을과 고을을 이루고, 크고 작은 부족 국가 나라를 세우면서, 수십년 수백년씩 부족의 흥망성쇠(興亡盛衰)를 되풀이하며, 민족이동을 하여 왔음을 되새겨볼 때,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를 출발하여(EXODUS), 사하라 사막과 홍해를 건느고 시나이 산맥을 돌면서 약 40여년에 걸쳐 지금의 예루살렘 지역으로 돌아왔던 사실은 한민족의 줄잡아도 고조선 건국 이전 5천여년에 걸친 민족이동에 비할 바가 아니다.
 
따라서 우리 겨레는 밝은 빛을 숭상하며, 흰옷을 즐겨 입던 겨레였다. 저 멀리 만년설로 덮여 있던 선조들의 고향 천산 산맥을 뒤로하며 떠나온 우리겨레는 부족의 경사나 큰 날에는 자기네 종족을 표시하는 흰옷을 입었으며, 부모님들의 장례 때도 모두 힌 옷을 입어, 최근에까지 이를 소복(素服)한다고 하였다. 1919년 대한제국의 고종황제가 서거하였을 때는 온 나라의 2천만 동포들이 몇 달 동안 모두가 힌옷으로 소복하였으므로, 온 나라가, 특히 서울 장안은 힌옷 입은 사람들의 물결이 차고 넘치듯 하여, 당시 서양 사람들을 놀라게 하기도 하였으니, 고대 중국의 史記에서까지 종종 우리겨레를 白衣民族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또한 마을마다 거의가 다 흔히 작고 큰 거룩한 동산을 등지고 살면서, 山을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사다리로 여기며, 山들을 神聖한 곳으로 믿고, 조상이 죽으면 쉽게 하늘에 오르도록 산에다 묘를 쓰기도 하였다. 한국학의 선구자들, 특히 아시조선(兒時朝鮮), 등을 저술한 六堂 崔南善(1890~1957) 선생을 비롯한 朝鮮 考古學의 선구자들은 우리겨레의 上古史에 관하여 연구하고 나서, 우리겨례의 선조들은 자신들을 天神族으로 神聖視하는 믿음이 있었음을 거룩한 史話로 우리에게 남겨 주었다.
 
그리하여 지금부터 대략 적어도 일 만년을 전후하여 우리 선조들은 자신들을 밝은 겨레, 배달겨레, 빛의 아들들이라고 부르며, 빛의 나라, 빛 고을을 찾아서 극동지방과 지금의 한반도에까지 오게 되었고, 자기들이 자리잡는 마을 이름도 빛고을(광주:光州), 별고을(성주:星州), 볕고을(양성:陽城), 밝은 고을(명주:明州), 흰 고을(백성:白城), 맑은 고을(청주:淸州), 빛나는 고을(화성:華城), 등의 이름으로 부르기를 즐겨하였으며, 자기네 고을 주변에는 하늘에 제사를 올리는 거룩한 산이 있어서, 힌 뫼, 밝은 뫼, 등을 뜻하는, 白頭山, 長白山, 太白山, 小白山, 白山, 白石山, 등으로 불렀으니, 萬年雪이 없고, 힌 돌이나 힌 바위가 없는 남부지방의 名山들 중에도 白山으로 부르는 경우가 적지 않은데, 이는 한마디로 고대인들의 언어 표현으로는, ‘聖山’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선사시대부터 다른 민족들처럼, 우리겨레도 부족에 따라서는 호랑이, 곰, 독수리 같은 동물을 위하는 지파들도 있었지만, 산이나 강, 바다나 별, 달이나 해나 하늘을 두려워하며 공경하는 부족들이 많았고, 특히 해(日)와 하늘(天)에 대한 정성은 큰 나무나 동물이나 지상의 산이나 강물 공경과는 한 차원 높은 부족 신앙의 대상으로서 至高至上의 神的 존재로 받들었다. 특별히 햇님은 先史人들에게 가장 고마운 神秘의 존재였으니, 先史人들이 날마다 겪으며 가장 두려워하는 밤의 어두움을 매일 아침 사라지게 하며, 온 누리를 밝혀주고, 겨울철 추위 속에서도 따뜻한 햇살을 내려주는 햇님은 쌓인 눈과 어름을 녹이며 새 봄을 주는 神的인 존재로 위할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지금도 南向東門을 가장 좋은 집터로 여기고 있는 것은 햇님을 숭상하는 정신에서 기인한 것이다.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수렵생활을 위주로 하던 우리겨레가 농경문화로 서서히 생활을 바꾸면서, 일조량이 많아 농사하기에 더 적합한, 따뜻한 동남쪽으로 이동하여 정착하면서, 하느님을 공경하는 그 정신은 더욱 정리되고 발전되어, 거룩하고 아름답게, 특히 순수(純粹)하고 소박(素朴)하고 진솔(眞率)하고 경건(敬虔)하게 계승되고 발전되어 내려왔으며, 수렵(狩獵)에 주로 의존하던 生活에서 가내 목축업(家內 牧畜業)으로 발전시키고, 마침내 농경문화로까지 정착하면서는, 간장, 된장, 김장 김치, 같은 발효식품 발명 등으로 급속도로 부족별 발전을 이룩하였다. 아시아 대륙의 內陸에서는 주로 귀한 돌 소금(石鹽)에 의존하다가 3면이 바다로 되어 있는 한반도에 이르러서는 천일염(天日鹽) 개발이 수월하였고, 풍성한 농산물과 각가지 광물자원 발견과 활용으로 상공업(商工業)의 발전도 기하게 되었다. 그러나 여러 갈래의 크고 작은 부족국가를 이루면서 같은 종족 간의 충돌로 적지 않았지만, 종교적인 신앙면에 있어서는, 大同小異하고 一脈相通하는 특징이 있었으니, 마침내 하늘에 제사를 올리며 天主님을 공경하는 천제교(天祭敎) 종교신앙 생활시대의 문화를 다같이 꽃피우게 하였다.
 
그리하여 지금부터 약 반만년 전쯤, 단군조선 시대를 전후하여서는 하늘 공경과 어른 공경, 족장 공경이나 나라님 공경이 어느 정도 제도화되고 풍습화할 정도로 발달하여, 하늘에 제사 드리는 예식이 극동의 한민족 거주지에서는 지역을 따라 여기저기 찬란하게 발전하였다. 특히 하늘에 제사를 올리는 관습은 보편적이며 오랜 전통으로 이어오던 신앙으로서, 우리겨레의 자연스럽고 순수하며 진솔한 한울님 신앙에서 유래한 것이고, 현대에 와서까지도,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하는 민족신앙이 애국가에서도 불려지고 있듯이, 우리겨레의 마음 속에는 늘 하느님의 얼이 깃들어 있는 것이다. 또한 국가 건립과 계승의 근거를 하느님께 두어, 古朝鮮과 三韓時代를 전후하여서는 지역마다 시대마다 명칭과 형식만이 조금씩 다르던 동일한 의미의 天祭敎 문화의 경축일들이 있었는데, 대부분이 음력 10월에 있었는데, 근대에 와서 열강들의 침략이 극심해지자, 開天節 이라는 名節로 통일하여, 민족기원의 최대 기념일로 제정하고 지금까지 경축하고 있다.
 
이렇게 우리겨레는 先史時代부터 半萬年 前, 有史以來로 다른 민족들과는 달리, 하느님 공경에 특별한 정성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하여, 수렵생활 시대에서나 농경생활 시대에서나 지역마다 대소간의 부족 국가를 세우면서도, 하느님 공경에 있어서만은 거의 大同小異한 방법과 정도였지만, 공통된 특별한 정성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 민족의 이러한 종교 정신과 문화는 지금까지도 온 국민의 마음과 생활 속에 깃들어 있으니, 예를 들어, 매년 음력 10월 3일에 경축하는 開天節, 즉, ‘하늘이 열린 날', '하늘을 열은 날’은 그 의미와 성격이 다른 나라나 다른 민족사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축일이다.
 
지금은 태양력을 따르지만,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전 최근까지도 본래의 전통을 따라 음력으로 10월 3일을 개천절로 지내었다. 이는 음력 8월 15일 한가위(秋夕)와 음력 1월 1일 설날을 지금도 음력으로 지내고 있듯이, 개천절도 음력으로 따져서 지내는 것이 역사와 전통문화 계승 발전에 더 합당하다고 하겠다. 이스라엘 민족과 2천년의 역사를 가진 천주교회에서 예수부활 대축일을 태양력으로 일정한 날에 기념하지 않고, 음력을 따라 매년 다른 이동축일로 지내고 있음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우리 선조들은 개천절이 들어 있는 음력 10월에는 매년 마을마다 고을마다 大同이 함께 마련하고 함께 참여하여 올리는 天祭를 올리면서, 대대로 전해 오는 조상님들의 묘를 찾아 성묘하며 時祭를 올리므로, 10월은 모든 달 중에 가장 먼저 위에 두는 크고 ‘높은 달’, 즉, ‘上月’, ‘상달’이라 부르며, 하느님 공경과 조상님 공경에만 집중하는 ‘聖月’로 지내었으니, 마치, 오늘날 우리 천주교회의 5월, 성모 聖月이나, 한국교회의 9월, 순교자 聖月, 사순절이나 대림절처럼, 이슬람의 라마단 기간과도 유사하게, 특별한 신심과 정성의 달이 음력 10월이었다.
 
심지어, 1950년 6. 25 사변 전까지만 해도, 구걸하는 걸인들의 각설이 타령에는, “10월이라 상달이니, 上帝님께 제사하세. 10월이라 상달이니, 祖上님께 제사하세” 라는 내용의 노래 귀절이 있어서, 아무리 흉년이 들고, 살기가 어려워도, 마을마다 고을마다 上帝 하느님께 제사하고, 자자손손 집집마다 조상님께 제사하라는 걸인들의 교훈적 외침이었다. 그래야 제사에 바쳤던 떡이나 술이나 고기를 걸인들도 좀 얻어 먹고 맛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가 애국가에서 부르는,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라는 말과 개천절의 내력은 적어도 반만년 이상 오래된, 우리 민족의 天主 思想과 정성을 밝히 전승해 주고 있는 민족 정신문화의 거룩한 遺産이다.
 
따라서 우리나라에는 아주 멀고 먼 옛날 고대로부터 지역마다 시대마다 크고 작은 여러 가지 종교가 적지 않았었는데, 대부분이 하느님 공경 정신을 터전으로, 바탕으로, 윤리적 근거로 하고 있으며, 불교나 도교나 유교나 천주교나 기독교 같은 외래 종교들까지도 우리 민족이 쉽게 이해하고 收容하여 보완하면서 우리 것처럼 지키고 아끼고 가꾸기 위하여 순교의 피를 흘리면서까지 바쳐가며 발전시킬 수 있었던 이유도, 우리 민족은 모든 종교가 지닌 행선피악(行善避惡)과 상선벌악(賞善罰惡)의 공통점을 이미 알고 있고, 믿고 있었기에, 이에 공감하며 실천할 수 있는 토대가 한민족의 유구(悠久)한 역사와 종교적 정신문화 속에 先天的으로 뿌리내려져 성장하여 왔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한국천주교회가 다른 나라들처럼 선교사들이 들어오기 전에, 우리 선조들이 자발적으로 천주교회를 창립하는데 가장 지대한 영향을 주어 가능하게 하였던 요인과 바탕은 바로 우리 민족의 선천적인 종교적 자질을, 마치 하느님이 미리 마련해 주신 歷史的인 터전처럼 결정적 요소가 되었음을 인정해야 하며, 그 외의 학업이나 생업 같은 조건은 시대와 장소와 사람에 따라 일시적인 성격을 띤 時事的이 부수적 조건으로 보아야 한다. 한마디로, 한국천주교회의 기묘한 창립사는 갑자기, 우연히, 한 때, 우발적으로 돌출된 사건이 아니라, 먼 옛날부터 준비되어 온(remota praeparatio) 요인들을 바탕으로 하여, 합당하고 적절한 계기를 당하여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예를 들어, 한국 천주교회 창립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이벽, 이승훈, 권일신, 권철신, 정약종 등, 우리 신앙 선조들이 당시 사회의 관습대로, 소년시절부터 千字文으로부터 시작하여 四書三經, 등 유학(儒學)을 배웠는데, 그렇다고 하여, 한국 천주교회는 儒學者들이 세웠다고 말하는 것은 매우 부족하고 잘못된 부당한 표현이다. 사실 당시 유학자들은 처음 출발하는 천주교회를 극심하고 잔인하게 박해하였을 뿐이다.
 
先史時代로부터 有史以來로, 삼국시대와 조선시대 뿐 아니라 현대에 와서도 적지 않은 신흥 민족 종교가 탄생하였는데, 이 역시 어느 특정 종교나 특정 학문의 영향이라기보다도, 한민족의 先天的인 종교적 자질과 역량을 터전으로 삼아, 적절한 계기가 주어지면 새 종교들이 적지 않게 탄생하여 내려온 것이다. 그러므로, 천주교회 외에도 儒學이 들어오기 전 우리 고대 사회나, 혹은 儒學을 修學하지 않은 후대 일부 지역에서도 여러 가지 토착적인 종교가 출발하였었는데, 모두가 유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오기 전이었으니, 유학자들이 주도한 것은 아니었다. 우리 민족은 토속적인 고유한 여러가지 종교들을 자생시키는 종교적 바탕을 선척적으로 타고 났다는 사실을 참고삼아 직시할 필요가 있다. 지금도 산업화와 과학과 경제의 발전으로 유롭의 여러나라에서는 탈교회 현상이 심각한 편인데 반하여, 한국에서는 경제발전에 정비례하여 종교도 발전하고 있음은 우리겨례의 선천적인 종교적 자질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또한 우리 민족은 대부분의 모든 종교가 가르치는 행선피악의 정신을 선천적인 천주 사상으로 폭넓게 수용하고 종합하여, 이미 반만년 전에는 대부족국가로 통합하던 단군조선을 세울 때, 홍익인간(弘益人間)의 정치도의(政治道義)를 건국이념(建國理念)으로 삼았는데, 이는 敬天愛人의 天主 恭敬 思想의 발로(發露)가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천주 신앙의 터전 위에서, 계시(啓示) 眞理의 씨앗이 어렵지 않게 진리의 움을 티우고, 신앙의 싹이 돋아나게 하여, 오늘의 한국 천주교회로 성장, 발전하기까지, 이와 관련된 중요 인물과 장소와 역사적 사건들을 우선 몇가지 만이라도 추려서, 간결하게 요약하여 되돌아 보고자 한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984년 한국에 오셔서, 1839년과 1846년 2차례 박해 중에 순교한 103위 순교복자들을 시성하였다. 그러나 사실, 1839년 이전에 이미 조선에서는, 1785년 乙巳年 박해, 1791년 辛亥年 박해, 1795년 乙卯年 박해, 1801년 辛酉年 박해, 1815년 乙亥年 박해, 1827년 丁亥年 박해, 이렇게 6 차례에 걸쳐 큰 박해가 전국 각처에서 있었다. 수 많은 한국신자들은 선교사들이 이 땅에 들어오기도 전에 그리스도교 구원의 진리를 진심으로 받아들였고, 이 새로운 종교를 전파한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던 상황에서, 특히 다섯 분의 한국 천주교회 창립성조들은 열정적으로 이 땅에 복음을 전파하면서 자발적으로 교회를 세웠고, 마침내는 자신들의 생명까지 천주와 교회를 위하여 용감하게 영웅적으로 봉헌함으로써, 그리스도를 피로써 증거하였다. 한마디로 배달겨례 스스로 싹틔운 교회가 피를 뿌리며 자라났으며, 목숨을 바치며 살아나온 것이다. 이 거룩한 하느님의 役事가 지금까지 역사 자료 소실와 연구미비로 일부 잘못 전하여 왔음을 조금이라도 바로 잡아 온 세계에 알리고, 후대인들에게 전해야만 하겠다.
 
따라서 거의 한 세기(1785-1885)에 걸쳐 있었던 한국천주교회의 참혹한 박해의 최초 시발점으로서 그 뿌리와 줄기가 되는 것은, 한국천주교회 창립성조 5위 평신도 순교자들의 자발적인 信仰史였음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이 위대한 신앙선조들의 생애와 정신과 덕행과 업적과 교훈을 간결히 추려서 이하에서 알아보는데 있어서, 그동안 거듭되던 박해로 인하여 역사 자료 보전이나 전승이 극난하여 잘못 알려진 부분들을 바로잡고, 이해를 돕기 위하여 다소간의 설명을 필요로 하는 곳이 적지 않다. 이제 전 세계 교회가 놀라운 역사로 인정하고 감탄하며 격찬하는, 한국 천주교회 창립에 있어서 뜻을 같이하고 힘을 함께 모으며, 거룩한 순교 선혈로 그리스도의 길을 함께 걸어간 우리 신앙의 선조들 중에, 우선 5위 성현들에 대하여 먼저 살펴보고자 한다.
 
한국천주교회 창립의 주역으로 순교하신 위대한 스승이며 대학자였던 세례자 요한 광암 이벽(1754-1785) 성조와 함께, 한국 천주교회의 창립에 온 힘을 기울이다가 마침내 생명을 바친, 베드로 이승훈 베드로(1756-1801) 진사(進士)와, 당시 프란치스꼬 사베리오 권일신 (1742-1792 대학자, 그의 형 암브로시오 권철신(1736-1801) 대학자, 또 새로 탄생한 한국천주교회 내의 최초 전도단체였던 明道會 초대 회장 아우구스띠노 정약종(1760-1801) 호교론가의 신앙과 활동과 순교사를 요약하여 살펴보기 위하여, 먼저 우리 신앙선조들, 특히 교회 창립의 주역이었던 광암 이벽 성조의 가문과 그 집안 선조들의 내력을 간단하게라도 두루 살펴보는 것은 매우 필요한 공부가 아닐 수 없다. 마치 뿌리없는 나무가 없고, 터 없는 집이 없듯이, 갑자기 우연히, 제절로 되는 일은 없기 때문이다. 더욱이 새로운 종교의 출발은 교리나 조직이나 서적이나 지식이나 권력이나 재력만으로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관계된 장소와 시대와 인물과 문화의 上下, 先後, 左右, 內外의 환경과 與件의 要素가 구비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다만 그 분들에 대한 호칭도, 200 여년 전 우리의 문화와 관습을 따라, 가능한 한 당시 어려서부터 자타가 부르던 관습부터 시작하여 써 나가므로써 보다 역사성을 살려보고자 한다.(계속)

Writer : 몬시뇰   Date : 2013-01-21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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