天眞菴聖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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丁若鏞 선생의, [始聞西敎]와 初聞西敎 !

사람을 만나면 천주교 이야기요, 자리에 앉으면 천주교 이야기를 하던 이벽 광암 공이, “甲辰년(1784) 여름 두미나루 배 위에서 또 천주교 이야기를 하는 것을, 당시 22세의 정약용 선생이 듣기 시작하여 책도 한권 같이 보았다”는 글을 곡해한 나머지, 정약용 선생은, [이 때 처음으로, 천주교에 관한 이야기를 생전 처음 들었다]고 풀이하는 識者들이 있다..” 그런데 같은 내용을 5년전 1816년에 강진에서 쓸 때는 始聞西敎라고 하지 않고 있다.

그런데 흔히, “始聞西敎”를, “初聞西敎”로 확대해석하는 것이 문제다. 한문에서, “”라는 글자는, “처음으로”의 뜻이 아니라, “바야흐로, 비로서, 즈음하여, 맞이하여, 당하여”의 뜻으로, 해마다 연초의 始務式이나 始業式, 또는 운동경기 때마다 하는 始球式이나 차 운전의 始動에서 보듯이, 라는 글자는 [생전 처음]의 의미와 관계없는 뜻이다. 국어 한문옥편과 중국어 옥편이나 사전을 참고하면 즉시 알 수 있는 국어의 상식이다.

천주교 이야기를 생전 처음 들었다고 말하려면, [初聞西敎]라고 쓰게 마련이다. [初行길, 初婚, 初面, 初産], 등에서 보듯이. 또 당시 정약용 선생은 조선의 박학다식한 선비로서, 22세가 되어서야 천주교 이야기를 처음 들었다는 것은 語不成說이다. 이미 이수광, 정두원, 허균, 이이명, 이익, 신후담, 안정복, 등 西洋學 大家들의 글을 전혀 접하지 못하였다고 볼 수 없는 정약용선생이다. 특히, 천진암에서 독서하는 이벽 광암 공한테 10세 이전부터 자주 놀러다니던(天眞菴, 石徑細如線, 昔我童時遊,,,.) 정약용 선생의 마재 집은 개울 건너에 있던 이벽 광암 공의 별장과 아주 근접한 거리로 나루터가 있기도 하여, 자주 들리던 처지로서, 두미 나루와 여울에서 쓴 詩文도 매우 많은 편이다(天眞消搖集).

더욱이, 같은 내용을 3차례나 정약용 선생은 기록하였는데, 1816년 강진 유배 중에 쓴 정약전 묘지명에서 좀 자세히 기록하였고(甲辰四月之望 旣祭丘嫂之忌 余兄弟與李德操同舟順流 舟中聞天地造化之始形神生死之理 창황驚疑若河漢之無極入京 又從德操見實義七極等數卷 始欣然傾嚮 而此時無廢祭之說), 유배가 풀려 고향에 돌아온 후 5년이 지나서, 1822년 회갑 때 마재에서 쓴 녹암묘지명(鹿菴墓誌銘)과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에서는 간단히 썼다(甲辰夏 從李檗舟下斗尾峽 始聞西敎 見一卷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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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회에 지적하고 싶은 것은, 일부 識者들이, [走魚寺 天眞菴 講學]이라고 종종 쓰고 있는 것은 큰 잘못이다. 강학을 알려주는 것은 정약용 선생인데, 정약용 선생 글 속에 어디에도, 走魚寺에서 講學을 하였다고 직접 표현한 문장은 없으며, 확대해석이나 짐작 해석뿐이다. 그러나 천진암에서 강학을 하였고(己亥冬講學于天眞菴), 천진암에는 이벽 광암 공의 讀書處가 광암 공 사후 12년 후에까지 있었으며(天眞菴 李檗讀書猶有處), 天眞菴에서의 소년시절 추억을 되새기며 지은 詩文은 허다하지만(天眞消搖集), 천주교 선전의 주동자였던(李檗首先西敎) 이벽 광암공과 정약용 선생 등이 주어사에 머물면서 강학을 하였다는 기록은 전혀 없기 때문이다.

특히, 한문 문장도, “일찌기 기해년(1779) 겨울에 천진암에서 강학이 있었는데, 주어사는 설중이더라. 이벽이 밤에 와서, 촛불들을 많이 켜고 경서를 담론하였다. 그 후 7년이 지난 후에 그 강학을 비방하는 소리가 생겨서, 그러한 강학을 다시는 더 이상 할 수 없었으니, 이른 바 소문난 잔치는 두 번 다시 하기 어렵다는 말과 같다(昔在己亥冬 講學于天眞菴 走魚寺雪中 李檗夜至 張燭談經 其後七年 而謗生此 所謂盛筵難再也-鹿菴 權哲身 墓誌銘-1822년 61세 回甲 때).

[于天眞菴]의 [于]는 장소 하나만을 지칭할 수 있는 語助辭다. 둘, 셋, 여러 장소를 표시하려면, [于]를 반복하든가, 아니면 [又]를 번번히 붙여야 한다. 즉, [于天眞菴 于走魚寺]라고 하든가 혹은 [于天眞菴又走魚寺]라고 해야만 되기 때문이다.

丁若銓 묘지명에서, [일찍이 겨울 달에 녹암 공이 주어사에 잠간 머물 때 강학이 있었는데, 때 모인 사람들은 김원성, 권상학, 이총억, 등이라고 하였다.](執贄請敎於鹿菴之門 嘗於冬月 寓居走魚寺 講學 會者 金源星 權相學 李寵億 等 數人 鹿菴 自授規程-先仲氏(丁若銓墓誌銘, 1816년 55세 때).

불교신도도 아니고, 더욱이 불교를 배척하던 녹암 공(諸君平日常斥佛而-順菴)이 작은 주어사의 방하나 부엌 하나 정도 별채에 당시 앓고 있던 脫肛病 요양으로 잠시 머물 때 강학이 있었다고 하여, 반드시 그 居處에서 강학을 하였으리라고 짐작으로 확대해석하지 말아야 한다. [于走魚寺]라고 하지 않고, “寓居走魚寺”라고 하였다. 주어사 부근에는 樊魚寺, 日出庵, 鳳泰庵, 石伊庵, 小庵, 天眞菴, 새절(新築?), 등이 아주 가까운 거리(500m~1km 내외)에 있었으며, 長幼有序의 시절에 당시 조카 권상학, 권상문, 등 아들 벌의 소년들과 함께 거하면서는 거북하여 상식적으로도 강학은 가까운 주변 타 암자에서였다.

③ 권철신은 족보 이름이 철신이고, 아명은 기명이며, 스스로 지은 호는 녹암인데, 이름있는 그 유명한 고장에서 살았으니, 가로되 감호라는 곳이다](公諱哲身字旣明自號曰鹿菴名其所居曰鑑湖安東之權也). 바야흐로 이벽이 우두머리가 되어 천주교를 선전하고 다닐 때, 말을 타고 감호에 이르러 10여일간이나 천주교 이야기를 하였다(始李檗首宣西敎,,,,遂駕至鑑湖). 여기서도 [至]라는 글자는 장소를 지칭하는 데 쓰이는 助詞로서, [사람에게 이르러]라고 쓰지는 않는다. 이제 기념비적인 거대한 鑑湖岩이라는 金石文까지 발견되었으니, 감호에 관한 논쟁이나 曲解는 끝난 것이다.

④  . 신해년(1791) 박해로 권일신 沙右居士 공이 박해자들이 보낸 자객들에 의해서 타살된 후부터, 그 형 권철신 성현은 제자들이 발을 끊고 찾아 오지를 않자, 대문을 안으로 걸어 잠그고, 슬픔을 머금은 채, 10여년 동안이나 山門 밖을 나간 적이 없었다(自玆門徒皆絶公杜門銜哀足跡不出乎山門者十年 - 정약용 선생의 녹암 묘지명). 여기서 말하는 山門이란 지형은 양평군 양근면 葛山里, 녹암 공의 고향 마을에만 해당된다. 강상면 大石里는 산문으로 말할 수 없다. 이유는, 산문이란 뒤와 양옆이 산으로 막히고, 앞에만 좁은 협곡이 되어 있어, 목책으로 쉽게 대문을 세울 수 있는 자연적이 요새여야 한다. 많은 사찰들이 이러한 계곡에 자리하고 있다. 선비들이 재야에 모여서 이루는 학문 연구나 정신수양의 단체를 이루는 것도 산문이라 하나, 녹암 묘지명에은, 足跡不出乎山門者十年  이라고 하였으니,지리적인 지형 표시 문장일 수 밖에 없다.

⑤ 한강개와 대장장이 직업의 권상문 ?사학징의는 누가 언제 어디서 썼는지 불확실한  서적으로서

양반 학자 권일신의 아들이 없는 큰 아버지 권철신 한테 양자로 들어간 젊은 학자인데, 대석리 산골에서 대장간을 하며 살았다는 표현은 잘못 기록된 것이다. 또 호미나 괭이 도끼 낫 같은 농기구를 제작하여 팔아서 사는 이들이 양평 장터, 양근리에 꽤 여럿이 있었으니, 사학징의 기록은 양근의 권철신 5 형제 양반학자 집안을 천대시하도록, 고의로 표현한 것이다.
 
上宰相書, 上宰, 宰相은 宰臣과 相臣의 합성어로서, 왕을 보필하면서 여러 臣僚들을 지도 감독하는 2품이상의 신하들을 뜻한다. 卿尹, 鳳池, 卿相, 宰卿, 宰輔, 卿宰, 宰臣, 등을 통칭하는데 쓰던 말이다.  上宰相書를 上宰書로 개작하여 번역본 표제로 삼은 것은 매우 서글픈 무식의 소치이다.

① 始聞西敎

甲辰四月之望 旣祭丘嫂之忌 余兄弟與李德操同舟順流 舟中聞天地造化之始形神生死之理 창황驚疑若河漢之無極入京 又從德操見實義七極等數卷 始欣然傾嚮 而此時無廢祭之說.-

(甲辰夏 從李檗舟下斗尾峽 始聞西敎 見一卷書-自撰墓誌銘과 鹿菴墓誌銘 1822년)

甲辰夏 從李檗舟下斗尾峽 始聞西敎 見一卷書.

講學于天眞菴

昔在己亥冬 講學于天眞菴 走魚寺雪中 李檗夜至 張燭談經 其後七年 而謗生此 所謂盛筵難再也-鹿菴 權哲身 墓誌銘-1822년 61세 回甲 때 丁若鏞 作-

執贄請敎於鹿菴之門 嘗於冬月 寓居走魚寺 講學 會者 金源星 權相學 李寵億 等 數人 鹿菴 自授規程-先仲氏(丁若銓)墓誌銘-1816년 55세 때 丁若鏞 作-

曰鑑湖

始李檗首宣西敎從者旣衆曰鑑湖士流之望鑑湖從而靡不從矣遂駕至鑑湖旬而後反於是公之弟日身熱心從檗.,,,公作虞祭義一篇以明祭祀之義出辛亥冬 湖南獄起睦萬中洪樂安指告日身日身始抵死不屈配濟州旣上諭之誨之日身自獄中作悔悟文上之宥配禮山出獄未幾而死自玆門徒皆絶公杜門銜哀足跡不出乎山門者十年辛酉春逮入獄. <丁若鏞의鹿菴墓誌銘>


Writer : 변기영   Date : 2012-04-04 2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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