天眞菴聖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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最初의 講學 場所가 天眞菴이라는 史實의 再確認

最初의 講學 場所가 天眞菴이라는 史實의 再確認

-[이달의 천진암] 통권 제11호,1994년 5월 5일 자 2면과 3면-

學者 權哲身 主導의 講學場所인 절을 찾아가는 李檗先生이 「길을 잘못들은 것(trompe de chemin-달레의 저술)」이 아니라, 「절을 잘못 알고 있었던 것(trompe de pagode-다블뤼의 기록)」이다.

韓國天主敎會 創立史에 관한 샤를르 달레 神父의 「韓國天主敎會史」著述 內容과 다블뤼 主敎의 「備忘錄」記錄內容의 對照에서 밝혀진 새로운 사실



한국천주교회 創立에 관한 역사 기록 중에, 天眞菴 講學會 개최에 대한 프랑스 선교사 샤를르 달레 신부의 「韓國天主敎會史」 저술 내용이, 그 原本 資料가 되는 다블뤼 주교의 「備忘錄」原本 내용과 다를 뿐 아니라, 講學 場所 糾明에 있어, 다블뤼 주교의「備忘錄」 내용은 매우 중요한 사실을 밝히고 있으니, 이를 現場地理와 對照할 때, 講學 場所는 天眞菴일 수 밖에 없다는 結論 외에는 달리 해석할 수 없음이 불가피함을 後代 學徒들을 위하여 여기에 일부 미리 밝혀 두고자 한다.

한국에 한번도 와보지도 않은 샤를르 달레 신부가 편술한 것으로 되어 있는 「韓國 天主敎會史」에 나오는, 한국천주교회 初期 學者들의 講學會 場所에 관하여, 필자는 이미 1990년에 아래와 같은 글을 발표하면서, 結論으로서, 달레 신부의 著述일부가 잘못된 것일 수 밖에 없다는 점까지도 지적하며 주장한 바 있었으니, 한마디로 講學會 場所에 관한 달레의 저술 중 일부가 다산의 기록과 현장 地形에 대조 할 때, 著述이 틀렸지, 地形이 틀릴 수는 없다고 주장하였었다. 그런데, 그 후 「한국교회사연구소」에 와 있는 다블뤼 주교의 「備忘錄」(*이것이 달레 신부가 저술한「한국천주교회사」 原稿의 原本資料임은 두말할 필요없이 역사관계자들이 자타가 공인하는 바이다)에 나오는 동일 부분의 문장들을 달레 신부의 저서 내용과 대조 비교하여 본 결과, 필자의 主張과 結論이 정확하였었음이 확인되었다.

이제 1991년 1월호 「司牧」誌 제144호(83면 참조)에 실렸던 글의 일부를 여기에 그대로 다시 한번 더 옮겨서 되읽어 본 후, 샤를르 달레 신부의 저술내용 원본과 번역문, 그리고 다블뤼 주교의 비망록 기록 원본(필기체)과 인쇄체문, 그리고 번역문을 모두 소개한 후, 이에 대한 내용 분석과 함께, 現場 地理에 대조한 바를 논증한 필자의 해석과 주장이 명확히 확증되었음을 밝히는 바, 이는 매우 기쁜 일이고, 또 지극히 당연한 귀결이기도 하기에 이하에 밝히고자 한다.

따라서 달레의 기록에 ‘길을 잘못 들었다’는 표현은 광주산맥과 한강 일대의 지형상 맞지 않는다. 다만 이벽 선생이 절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강학 장소를 찾아 가는 것이고, 강학은 장소가 하는 것이 아니고 인물이 하는 것인데, 그 당시 강학을 주최하고 주관하는 인물은 권철신과 정약전이니, 이들이 머무는 곳이 주어사였다면 분명 이벽선생은 주어사를 먼저 찾아갔을 것이다. 그런데 정약전은 자기 집에서 주어사보다는 천진암이 더 가기 쉬운 평탄한 길이고, 또 동생 정약용과 천진암을 방문했던 기록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녹암이 주어사에 우거할 때(혹은 정약전도 녹암과 주어사에 함께 우거할 때이든 간에) 강학 장소로 알고 믿고 있던 이벽 선생이 찾아가는 곳은 주어사였으나, 강학은 그곳에서 이루어지지 않았고, 뜻밖에도 산너머 천진암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결국 달레의 기록에서 길을 잘못 들었다는 표현은 강학 장소를 잘못 찾아갔다는 것으로 알아들어야 무리가 없다. (「한국천주교회 창립-1779년인가 1784년인가-」변기영 신부. 1991년 1월호「司牧」지 144호 78면-83면 참조)

이상의 글에서 筆者는 이미 달레 神父의 著述內容一部가 現場 地理와 맞지 않는 部分이 있음을 指摘하는 同時에, 겨울 밤 雪中에 講學이 열리고 있는 場所, 즉 山 속에 있다는 절간을 찾아가는 曠菴 李檗 先生이「길을 잘못 들었다」는 表現은 講學 場所, 즉 「절을 잘못 알고 찾아갔다」는 表現으로 알아 들어야만 한다고 主張하였는데, 1990년도 가을에 이 글을 쓸 당시는, 필자가 다블뤼 주교의 備忘錄을, 한국교회사연구소에서 얻어 보기 전이었다. 즉, 달레신부의 기록을 천진암 주변 지리와 대조해보고, 다산의 기록과 비교 대조해 본 결과, 달레의 저술이 잘못된 것이므로,「달레의 기록에 이벽선생이 “길을 잘못 들었다”는 표현은 광주산맥과 한강 일대의 지형상 맞지 않는다,」고 지적하고,「결국 달레의 기록에서, “길을 잘못 들었다”는 표현은 강학이 개최 되고 있다는 장소인 “절을 잘못 알고 갔었다”는 것으로 알아들어야 무리가 없다」고 필자는 결론하였었다. 그런데 이하에서 보는바와 같이, 달레 신부가 다블뤼 주교의 기록을 옮겨서 재저술 편집하는 과정에서 일부 내용을 뜯어 고쳤음이 밝혀졌다. 즉,「절이 틀렸다(trompe de pagode)」는 다블뤼의 기록을,「길이 틀렸다(trompe de chemin)」라는 말로 달레가 말을 바꾸었음이 밝혀진 것이다. 사실 이것은 고친 것이 아니라 망친 것이다.

한마디로, 조선에 와서 20여년간이나 근무하고 있던 다블뤼는,「강학회를 하고 있는 절」을 찾아나선 이벽이 절을 틀리게 알고서 다른 절로 찾아 갔다. 즉「절이 틀렸다{trompe de pagode}」고 기록하였는데, 수십년 후, 프랑스에서 이 기록을 가지고「조선천주교회사」를 써나가던 달레는 프랑스 독자들을 위하여 다블뤼의 문장을 손질하는 과정에서, 이를 가지고 “길을 잘못 들어서 다른 절로 갔다”즉「길이 틀렸다(trompe de chemin)」고 옮겨쓴 것이 이번 조사 대조 결과 확인된 것이다.

물론 프랑스 독자들에게 “길이 틀렸다”는 말이나,“절이 틀렸다”는 말이나 비슷한 같은 의미로 받아들이겠지만, 강학장소, 즉 절의 이름을 규명하려는 우리에게는, 天眞菴과 走魚寺만큼이나 차이가 나는 아주 다른 의미가 있는 것이다. 이 기회에 한국천주교회사 관계자들에게 제안하고 싶은 것은 다블뤼의 비망록과 달레의 저술을 일일이 대조하면서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는 사실이다.

한국천주교회 창립사에 있어 상당히 중요한 사건으로 다루어져오고 있는 최초의 강학에 관한 외국자료가 되는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와, 국내 자료 중 역시 매우 중요하게 다루어져온 다산의 묘지명에서 거론되는 최초의 강학장소에 관하여, 달레서가 말하고 있는 2개 장소의 이름이 다산이 말하고 있는 天眞菴과 走魚寺라는데 이의를 제기하는 학자는 아무도 없다.

다만, 권철신을 중심으로 개최되고 있는 강학 장소로 알고 이벽선생이 밤중에 눈길을 헤치며 찾아간 첫번째 절에는 강학도 없었고, 있어야할 권철신도 없어서, 스님들을 깨워 쇠지팡이를 짚고 큰산을 넘어가서 두번째 장소에서 권철신과 학자들을 만나서 함께 강학를 하였다는데, 허탕을 친 첫번째 절이 2개 장소 중에 어느 곳이었느냐에 따라 실제로 강학이 있었던 곳, 즉 실제로 강학이 개최되고 있던 곳이 확실하게 밝혀지게 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이벽선생은, 강학회가 권철신의 주재로 천진암에서 개최되고 있다고 믿고, 천진암을 우선 찾아갔을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니, 그 이유는 그 당시 강학의 주임강사이며 주동 인물인 권철신은 큰 산맥을 경계로 자기 집 쪽에 가까이 있는 주어사에 머물던 학자이며(寓居走魚寺 - 茶山의 기록), 특히, 정약전도 권철신을 스승으로 모시러 찾아가 뵙던 시기이므로, 대학자 권철신이 참석하며 주관의 강학이 있다는 소식을 들은 이벽이 찾아가는 절은 우선 走魚寺일 수 밖에 없고, 한 겨울 눈속에서 밤중에 走魚寺를 찾아간다고 가던 이벽선생이 길을 잘못들어서 天眞菴으로 갔다가 허탕을 치고, 그 높은 앵자산을 넘어 가서야 주어사에 도착하여 함께 강학을 하였다는 주장을 국내 일부 학자들은 지난 20여년가까이 해오면서,「녹암 권철신이 전에 일찌기 기해년 겨울에 천진암에서 강학을 할 때 주어사에서 설중인데도 이벽이 밤중에 천진암에 도착하여 촛불을 밝히고 경서를 담론하였다(昔在己亥冬講學于天眞菴走魚寺雪中李檗夜至張燭淡經 - 茶山의 기록)」는 문장에서 講學于天眞菴이라는 명백한 사실을 무시하는 주장을 하였었는데, 그 이유 중에 주요한 해외문헌으로서 달레의 기록 즉, 강학이 개최되고 있다는 절을 찾아가는 이벽이 길을 잘못들어서(trompe de chemin) 다른 절로 가게 되었었다고 기술한 달레의 저 기록을 글자 그대로 무비판적으로 받아 들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다산의 국내 기록, 즉 講學于天眞菴이라는 문장과 앵자산 주위의 지리와 지형에 모든 기록을 현장대조시키며, 수차례 답사하며 조사해본 결과 달레의 저서기록이 틀릴 수 밖에 없으니, 강학은 실제로 天眞菴에서 개최되고 있었는데, 이것을 모르고 있던 이벽 선생은 권철신이 머물던 走魚寺에서 학자들이 강학을 하고 있으련 하고, 즉 강학하고 있는 절을 주어사로 잘못 알고 떠났기 때문에, 길은 제대로 주어사 가는 길로 갔으나, 절은 강학하고 있는 절이 아니었으니, 다른 말로 말하면 절이 틀렸다는 사실을 필자는 주장해왔던 것이다.

결국 문헌고증학적인 방법에 과도히 치중하다보면 현장상황을 소홀히 하기 쉬운데, 새로운 문헌자료가 나오면 종래의 주장을 바꾸거나 수정하여야만 한다, 그러나 현장 지형 조사와 연구를 위주로 하여 이루어진 주장이나 결론은,“山川은 依舊하다”는 말의 뜻과 같이, 산맥과 강줄기처럼 바뀌지 않음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결국 어떤 事件에 관한 여러 문헌들은 서로 다를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어서, 記述은 틀릴 수 있어도, 사건이 일어난 地形은 바뀌거나 틀릴 수가 없다. 이제 달레 神父가 著述한「韓國天主敎會史」원문과 번역문 그리고, 그 內容의 原本資料가 되는 다블뤼 주교의 備忘錄 原文과 飜譯文을 대조해보자. (우편3면의 다불뤼 주교 필기체 원문은 이하에 인쇄체로 게재 참조)

다블뤼 주교의 記錄 내용을 달레 신부가 옮겨 적으면서 편집하는 과정에서 종종 내용이나 表現의 變質, 添削 敍述을 발견하게 되는데, 이 강학에 관한 기록에 있어서도 그러한 差異点이 발견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달레의 기록과 다블뤼의 기록이 다른 경우, 다블뤼의 기록을 더 중요시해야 함은 두 말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러면 한국천주교회 초기 학자들의 강학회 개최에 관한 다블뤼의 기록 내용을 간추려보자.

1. 1777년(정유년)에 당시 저명한 학자 권철신과 정약전 등이 어느 고요한 절(pagode)에서 강학회를 하고 있었다.

2. 이벽은 이 소식을 듣고 기뻐서 자신도 그들의 강학회에 함께하기로 결심하였다. 때는 겨 울이라서 길마다 눈이 쌓였지만, 100여리나 되는 그곳을 향하여 즉시 길을 떠났다.

3. 그리하여 이벽은 해가 졌는데도 피곤을 모르고 걸었고, 極難하고(difficiles) 險惡한(ardus) 길(chemins)을 걸어서 子正무렵에서야 어떤 절(pagode)에 도착하였다.

4. 그런데 권철신 일행은 그 절에서 강학을 하고 있지 않았다. 즉 강학 장소인 절을 잘못 알고(trompe de pagode) 찾아간 것이었다.

5. 예상 외로 강학이 열리고 있는 곳은 그 큰 산 반대쪽이었다.

6. 그래서 스님들(les bonzes)을 깨워, 쇠지팡이를 짚고, 눈을 헤치며 그 큰산을 넘어가서, 마침내 山中心에 있는(dans le sein des montagnes) 외딸고(isole) 폐허가 되어 쓸 수 없는 흉가집으로 버려진(perdu) 건물(edifice)에 이르자, 그곳의 居住者(les habitants)이 놀랐으며, 거기서 이벽선생은 그들과 함께 10여 일간 강학회를 하였다.

이상의 줄거리를 당시 생활환경 속에서 관계인물과 지형 등에 대조시키며 검토하여 볼 필요가 있다. 즉 종이 위에 그려진 몇 글자 기록에서 나와서, 20여년 전 시대로 올라가 한강상류 광주산맥 현장으로 옮겨가보자.

1) 200여년 전 조선인들은 대부분 모두 걸어서 다녔고 부유층에서나 말을 타고 다니며 생활하였으므로, 각자 자기 고장의 주변의 길을 잘 알고 있었다.

2) 특히 이벽선생(講學會 당시 26세)은 천진암과 주어사가 있는 앵자산이 바라보이는 두미에 거주하며 살고 있었으므로, 그 周邊의 名山과 寺刹들 가는 길, 특히 당시 저명한 대학자 권철신이 머무는 곳 주변의 길들을 잘 알만한 나이의 지성인이었다. 심지어 험난하지만 빨리 갈 수 있는 지름길까지도 알고 있었다고 보는 것은 당시 사회의 생활 여건상 상식적인 이야기다.

3) 또 두미에서 약1km내외 떨어진 바로 강 건너 마재에 있는 정약용의 맏형 정약현 집이 누님(강학 당시 29세) 집이었고, 종종 누님댁에 들릴 수 있었던 이벽선생은 이 고장 주변의 지리와 도로를 잘 알고 있었기에, 밤중인데도, 더욱이 사람들이 다니지 않는(chemins impraticables-달레의 표현) 험한 지름길까지도 택할 수 있었다.

4) 더욱이 정약용과 정약전, 즉 이벽선생의 사돈들은 어려서 일찍부터 이벽선생을 추종하면서 지내던 사이었다(嘗從李檗 - 茶山의 기록).

5) 저들은 천진암 계곡 입구가 되는 退村, 分院, 馬峴, 斗米, 花郞坊등 소내 지역에 관한 詩들을 지었으니, 이벽선생이 天眞菴 가는 길과 走魚寺 가는 길을 몰라서, 여주군의 “走魚寺로 간다는 것”이 광주군의 “天眞菴으로 갔다”고 할 수는 없다. 젊은 선비들이 마치 정거장처럼 자주 들러 가는 마재에서 走魚寺는 양근 쪽, 동쪽으로 가게 되고, 천진암은 퇴촌 쪽, 즉 남쪽으로 가야 하기 때문이다.

6) 이벽 선생이 첫번째 절에 도착하는 시간이 밤중이라면 적어도 오후부터 출발한 것이고, 따라서 서쪽으로 기우는 해를 등지고 가게 되기 때문에 두 절의 방향과 거리와 晝中步行 시각과 深夜倒着 시각으로 보아, 첫번째 도착한 절을 천진암으로 보기에는, 너무 가까워 무리가 있으나, 주어사라고 하면 매우 합리적이고 상황에 부합한다고 아니할 수 없다.

7) 강학의 주동인물이며 어른은 권철신이고, 당시 권철신이 머무는 절이 권철신의 집에서 가까운 주어사였으니(寓居走魚寺 - 茶山의 기록), 이벽선생이 찾아가는 절은 우선 주어사일 수 밖에 없다.

8) 강학이 열리고 있는 것으로 듣고 찾아 나서서 첫번째 도착하는 절은 100여리가 넘는 거리라고 전하는 것으로 보아, 옛날식 거리 추정 표현으로 마재 양근을 거쳐서 가는 주어사라야 더 타당하지, 천진암은 비교적 보다 가까운 거리이므로 강학이 열리고 있는 곳으로 알려진 절은 주어사일 수 밖에 없다. 또 이벽선생이 평양이나 강릉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고, 서울 수표동이나 광주 두미에서 마재를 거치는 것은 상식에 속하는 지리와 당시의 도로 사정이다.

9) 특히 강학이 있는 절을 찾아 나선 이벽선생이 첫번째 절에까지 이르는 여행기술에 있어, “극난하고 험악한 길들(chemins difficiles et ardus)"을 통과했다고 하는데, 이것은 분명히 일반 통행로가 아닌 지름길로서, 단순히 겨울에 눈쌓인 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길 자체가 험하고 거칠다는 뜻으로, 천진암에 이르는 길은 고개도 없는 평탄한 길이며, 16대째 살아오는 이들이 늘 다니면서 연결된 마을을 이루고 있어서, 도로에 대한 이러한 표현은 천진암에 이르는 도로 기술일 수는 없으며, 주어사로 가는 길에만 해당성이 있고, 또 사실에 부합이 되는 표현이다.

10) 즉 주어사로 가는 길은 양근을 거쳐서 가더라도 세월리 고개를 2개나 넘어야 하고, 빨리 가기 위해서 직선 길인 동오리와 항금리를 거쳐 주어재로 가면 더 험한 고개들을 넘어야만 한다. 그런데 이 주어재 길, 바로 이 길이 다블뤼의 기록과 가장 부합되는 길이다. 즉 양근과 세월리를 거쳐 정상적인 길로 가다가 밤은 깊어가고, 가기는 가야하겠으므로, 중간에 지름길을 택한 것이 아닐 수 없다. 즉 이벽선생이 도착한 첫번째 절은 이 험로를 지나서 가게 되는 주어사일 수밖에 없다.

11) 다블뤼 주교의 비망록을 읽으면서 느끼는 점은, 한문이나 한글로 된 어떤 문헌을 앞에 놓고서 불어로 번역해 나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을 받는 것인데, 우선 시작부터 ( )안에 “정유”년 표시라고 한 것이 그렇고, 이하에 참고로 제시하는 용어나 귀절이 어떤 기록으로 된 내용을 충실히 따라가면서 쓰는 듯한 느낌과 인상을 받게 된다.

예를 들면, 우선 불교에서 말하는 寺에는 大雄殿이 있고, 庵에는 大雄殿이 없는 것이 특징인데, 寺에서는 佛供, 法會 등 衆生들의 行事性을띤 佛供禮節이 爲主이지만, 庵에서는 고요히 參禪, 講學등을 하는 高僧들이나 學者들의 修道와 硏究, 讀書, 등을 爲主로 한다. 그래서 庵子란 修道나 修學하는 道人들의 居處에 불과한 곳이므로, 큰 바위(庵)나 풀(菴)로 가리워져, 그저 비바람이나 피하는 居處의 성격을 띠고 있다.

그런데 다블뤼의 프랑스어 기록에서도 마치 走魚寺의 寺와 天眞菴의 菴을 구별지어 표현하려는 듯, 처음부터 거론하여 써 오던「절(寺)」이라는 단어를 첫 번째 도착하는 장소까지는 그대로「절(pagode)」이라고 같은 단어만을 3차례나 계속 써오다가, 마지막으로 도착한 강학 장소에 대해서는「절(寺pagode)」이라는 단어 사용을 갑자기 중단하고, 그냥「施設物(edifice)」이라고 했는데, 달레는 이를 居處(demeure)라는 유사한 의미의 단어로 바꾸어 쓰므로서, 첫 번째 도착한 절(寺)과 두 번째 도착한 암자(庵子)를 그 기능과 용도와 표현 면에서 구별하여 표시라도 하려는 의도가 아니었나 하는 느낌을 받게 된다. 한국에 와서 꽤 오래 머물던 선교사의 글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단순히 단어의 반복을 피하기 위해서라고만 지나쳐버리기에는 좀 어딘가 모르게 다시 한번 고개를 갸웃거리게 하는 대목이다.

만일 다블뤼 주교의 위 글에서 단순히 동일한 단어 즉「절(pagode)」이라는 단어를 너무 여러 번 째(4번째)사용하는 반복을 피하기 위하여 4번째 끝에 와서는「건축물」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면 별문제가 아니지만, 두 곳 불교 기관이나 건물의 등급이나 종류나 용도나 기능을 구별짓는 원어 즉, 寺와 庵을 표현해보려고 한 것이었다면, 이 역시 두 번째 도착한 곳에 대한 표현은 天眞菴에 더 해당되는 것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12) 또 첫 번째 도착한 절에서는 모든 “스님들(les bonzes)”을 깨워 함께 큰 산을 넘어 갔다고 하고나서, 두번째 도착한 곳에 대하여는 단순히 건물이라는 표현에다가 그곳에 “거하는 자들(les habitants)”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물론 이러한 표현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겠으나, 그 “건물에 머물던 스님들과 강학회에 모인 학자들”이라는 자연스러운 기술이 아닌, 구별을 느끼게 하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으니,「寺(pagode)와 庵(edifice)」, 그리고「스님들(bonzes)과 거하는 자들(habitants)」같은 이질적인 표현이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13) 그리고 山의 中心(dans le sein des montagnes)에 외따로(isole) 떨어져 있는데다가 폐허가 되어 쓰지 않는 흉가집 같은 폐찰(perdu) 건축물(edifice)이라는 표현역시, 앵자산 서북쪽 중심계곡에 하나밖에 없었던 암자인 天眞菴은 외딴 암자로서 오래된 헌 건물로서 폐찰이 되다시피 한 곳이었으니, 얼마 후 다산 정약용이 천진암을 방문하여 읊은 詩에서, “天眞菴에 와보니 寺破無舊, 즉 절은 다 무너져서 옛 모습이 없구나.” 하였는데, 당시 저명한 권철신의 신분과 지위로 보아, 이러한 곳에 머물 수는 없으니, “鹿菴 權哲身이 寓居 走魚寺”하던 시대였으므로, 이벽 선생이 산을 넘어 찾아간 절간은 천진암일 수밖에 없다.

또한 주어사는 앵자산 동쪽의 오른쪽 날개 계곡에 있었으므로, [山의 中心에]라고 말하기에는 천진암보다 덜 적합하며, 또 주어사가 있던 같은 동편 계곡에는 鳳台庵, 日出庵, 石伊庵, 白年庵 등이 비교적 가까운 거리(300m내외)에 있었으므로, 주어사를 조용한(tranquille, calm) 곳이라고 말할 수는 있어도, 아주 외딴(isole et perdu) 곳이라고 표현하기에는 주어사보다 천진암에 더 부합하는 記述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물론 산에 있는 모든 절간에 대하여 일반적으로 쓸 수 있는 표현들이기는 하지만, 내용과 주제는 물론 특히 기록자인 다블뤼주교가 일반적인 수필가가 아닐 뿐더러 역사의식이 철저한 정밀표현의 필치를 가진 선교사라고 할 수 있기 때문에 일반적인 표현으로만 받아들이기에는 어딘가 餘韻을 부정할 수 없는 느낌이 있는 것이다.

14) 이 외에도 호랑이 굴 등, 여러 가지 記述面을 현장과 대조해 볼 때, 다블뤼는 마재와 앵자산, 천진암과 주어사 터 등을 답사하였었다고 보는 것도 무리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답사하지 않고 그렇게 기술하기가 힘들 뿐더러, 원본이 있다고 하더라도, 원본에서 그 정도로 그렇게 쓰여져 있기는 쉽지 않기 때문이다. 현장과 현장에 관한 여러 가지 기술을 대조 비교함에 있어서, 혹자는, A자료니, B자료니, C자료니, D자료니, 호칭하여 상호 대조하는데 있어, 상이한 점 때문에 맞는다, 안 맞는다, 하는데, 모든 자료가 각각 완벽하지 않아서, 마치, 예수의 생애 중 어떤 동일한 사건에 관한 4복음서의 기술이 상이하듯, 또 그렇다고 4복음이 다 틀리고 무가치한 것이 아니듯, 부분 부분이 상이한 안 맞는 것을 안 맞는 면에 대조하니 안 맞을 수밖에 없고, 또 안 맞아야만 하는 것이니, 이런 점을 내세워 부분을 전체시하는 경향이 없지 않으나, 모든 자료는 相互補完的인 면을 내포하고 있음을 소홀히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하여간 이곳에 대한 현장체험을 전혀 해본 적이 없는 달레는 프랑스 독자들을 염두에 두고 다블뤼의 문장을 손질하면서, 아마 별 관심 없이,「절이 틀렸다」는 다블뤼 주교의 역사가적인 표현으로 된 기록을 가지고,「길이 틀렸다」고 넓은 의미에서 大同小異한 일반적 표현으로 바꾸어 놓았으나, 이것이 강학회에 참석하는 이벽선생의 열성과 고생에 대한 大義面에서는 그 말이 그 말이라고 할지 모르지만, 강학장소로 거론되고 있는 2개의 장소, 즉 천진암과 주어사 중에 澤一糾明이라는 狹義面에서는 아주 큰 차이가 있는 것이다. 한국에 20여 년간 살던 사람의 기록을 한국에 한 번도 와보지 않은 사람이 고친다는 것이 사실은 어떤 면에서 망쳐놓은 것이다. 그래서 百聞而不如一見이다.

결국 이상의 비교연구 검토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달레가 저술한「한국천주교회사」에 나오는 교회 초기 학자들의 강학이 개최되었던 절은 천진암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달레의 기록을 뒤집는 다블뤼의 기록이 나왔는데도, 종래의 동일한 주장 즉, 이벽선생이「길을 잘못들어서」라는 달레의 저술만을 따라, “천진암으로 먼저 갔다가 주어사로 갔다”고 해서는 안 될 것이다. 확실한 새 자료가 나오면 옛 자료에 근거한 잘못된 주장은 반드시 새롭게 바로잡아져야 하겠다.

따라서 李檗先生은, 「길을 잘못 들어서(달레)」가 아니고, 「절을 잘못알고 있어서(다블뤼)」, 險한 지름길을 통하여, 雪中에 權哲身이 寓居하던 走魚寺를 거쳐서 鶯子山을 넘어 天眞菴에 도착하여 學者들과 함께 講學會를 하였음이 明確하다.





(昔在己亥冬講學于天眞菴走魚寺雪中李檗夜至張燭談經 - 茶山의 記錄).

(지금까지 昔在己亥冬講學于天眞菴走魚寺雪中李檗夜至張燭談經이라는 茶山公의 文脈에 대하여 그 時代 사람들은 한 가지 의미로 알아들었던 것을 지금에 와서 현대인들이 여러 가지로 해석하고 있는데, 이에 대하여는, 200여 년 전 우리나라 學者들의 語文慣習, 특히 茶山의 많은 著書 속에 나오는 類似한 表現의 文體들을 列擧하면서, 그 한 가지 의미의 뜻을 다음 번 기회에 論述키로 하겠다. 天眞菴 講學會에 관하여 확실한 것은, 이에 대한 여러 가지 기록들, 특히 丁若鏞의 文獻과 丁學術의 記錄 및 다블뤼의 記錄 등 모든 기록들이 서로 背馳되지 않고 一致하고 있을 뿐더러, 오히려 相互補完的이라는 사실이다.)

다블뤼 주교 「한국천주교회사 비망기」

C'etait en l'annee 1777 (ting iou). Le fameux docteur Kouen T'siel sini accompagne de Tieng Jak Tsieni et plusieurs autres nobles studieux et amateurs de la science se rendit dans une pagode pour s'y liver ensmble a des etudes profondes.

Ni Pieki l'ayant appis en fut rempli de joie et heureux de pouvoir profiter des le??ons de ces hommes remarquables il prend de suite son parti d'aller les trouver. C'etait l'hiver. La neige couvrait partout les routes et la distance etait de plus de cent lys: mais de pareils obstacles etaient loin de pouvoir arreter ce coeur ardent et si avide de la science et de la sagesse, Il part de suite a travers ces chemins difficiles et ardus il ne sent pas la fatigue. Le jour tombant ne peut le determiner a retarder la realisation de ses desirs et continuant sa route de nuit il parvint enfin a une pagode vers minuit. Quel n'est pas son desappontement en apprenant qu'il s'est trompe de pagode et qu'il fallait aller de l'autre cote de la montagne. Sans se decourager il pousse sa pointe. C'est une enorme montagne qu'il faut franchir de nuit. Elle est couverte de monceaux de neige et des tigres nombreux en defendant les abords. N'importe! Pieke fait lever tous les bonzes et se fait accompagner par eux. A la main il prend un baton ferre pour se defendre des attaques des sauvages ennemis et poursuivant sa route a travers les epaisses tenebres. il arriva enfin au lieu si desire. Une arrivee si eteange repandit la frayeur parmi les habitants de cet edifice isole et perdu dans le sein des montagnes.

On ne pouvait se figurer quel motif amenait a une heure si indue des hotes si nombroux: mais bientot tout s'etant eclairci la joie le bonheur succederent a la crainte et dans les epanchements suggeres par une rencontre si heureuse on s'appercut a peine que dejia le jour avait point. Pendant plus de dix jours que dura cette reunion, on approfondit toutes les doutes et les opinions des anciens furent mis sur le tapis. De la,,,,,,

때는 1777년(정유), 유명한 학자 권철신이 정약전과 그밖에 학문을 좋아하고 학구적인 여러 양반들을 데리고 함께 깊은 연구에 전념하기 위해 한 절로 갔다. 이 소식을 들은 이벽이 기쁨에 넘쳤고, 또 그 유명한 사람들의 강의에서 이득을 얻을 수 있게 된 것을 기뻐하며 즉시 그들을 만나러 가기로 결심하였다. 때는 겨울이었다. 눈이 곳곳의 길을 덮었고, 거리도 100여 리나 되었다. 그러나 그러한 어려움들이 그렇게도 학문과 지혜를 열망하고 탐내는 그의 마음을 저지시킬 수는 없었다. 그는 즉시 떠났고, 길들이 힘들고 험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지칠 줄을 몰랐다. 또 해가 저문 것도 그의 욕망의 실현을 지연시키게 할 수 없었고, 그래서 그는 밤길을 계속하여 마침내 자정 무렵에 한 절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절이 틀렸고, 또 그 산의 다른 편으로 가야 함을 알았을 때, 그의 실망은 어떠하였을까. 그러나 그는 길을 단호히 계속하였다. 그가 밤에 넘어야 할 산은 거대한 산으로, 눈더미로 덮여 있었고, 많은 호랑이들이 사람들의 접근을 막고 있었다. 상관없다! 벽은 모든 중들을 깨워 자기와 동행하게 하였다. 맹수의 습격을 막아내기 위해 그는 손에 쇠방망이를 들고 캄캄한 밤중에 길을 계속하여 마침내 그렇게 바라던 장소에 도착하였다. 이처럼 이상한 도착은 산속에 외따로 파묻혀 있는 그 건물의 거주자들에게 두려움을 퍼뜨렸다. 무슨 이유가 이렇듯 많은 손님들을 때아닌 이런 시각에 오게 하였는지를 상상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곧 모든 것이 밝혀져, 공포가 기쁨과 행복으로 변했고, 이렇듯 다행한 만남으로 인한 심정을 토로하는 가운데, 벌써 날이 샌 것도 미처 모르고 있었다.

달레신부의 「한국천주교회사」

En I'annee tieng-iou(1777), le celebre docteur Kouen Tsiel-sin-i, accompagne de Tieng Iak-tsien-i et de plusieurs autres nobles desireux d'acquerir la science, s'etait rendu dans une pagode isolee pour s'y livrer avec eux, sans obstable, a des etudes approfondies. Piek-i, l'ayant appris, en fut rempli de joie, et forma aussitot resolution d'aller se joindre a plus de cent lys de distance. Mais ces difficultes ne pouvaient arreter un coeur aussi ardent. Il part a I'instant meme, il s'avance resolument par des chemins impraticables. La nuit le surprend a une petite distance du but de son voyage. Il ne peut se determiner a attendre plus longtemps, et continuant sa route, arrive enfin vers minuit a une pagode. Quel n'est pas, alors, son desappointement en apprenant qu'il s'est trompe de chemin, et que la pagode qu'il cherche est situee sur le versant oppose de la montagne! Cette montagne est elevee, elle est couverte de neige, et des tigres nombreux y ont leur repaire. N'importe, Piek-i fait lever les bonzes et se fait accompagner par eux. Il prend un baton ferre pour se defendre des attaques des betes feroces, et, poursuivant sa route au milieu de tenebres, arrive enfin au lieu desire. L'arrive de Pieki et de ses compagnons repandit d'abord la frayer par mi les habitants de cette demeure isolee, et perdue au milieu des montagnes. On ne pouvait imaginer,,,,

정유(1777)년에, 유명한 학자 권철신은 정약전과, 학식을 얻기를 원하는 그 밖의 학자들과 함께, 방해를 받지 않고 깊은 학문을 연구하기 위하여 외딴 절로 갔다. 이 소식을 들은 (이)벽은 크게 기뻐하며 자기도 그들 있는 곳으로 가기로 결심하였다. 때는 겨울이라 길마다 눈이 덮여 있었고, 절까지는 백 여리나 되었다. 그러나 그런 곤란이 그렇게도 열렬한 그의 마음을 꺾을 수는 없었다. 그는 즉시 출발하여, 사람이 다닐 수 없는 길을 용감하게 걸어갔다. 그의 여행 목적지까지 얼마 안 되는 거리에 갔을 때 밤이 되었다. 그는 더 오래 기다릴 수가 없어서, 내쳐 길을 계속하여, 마침내 자정께 어떤 절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자기가 길을 잘못 들었다는 것과 자기가 찾아가는 절은 그 산 뒤쪽 산허리에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의 실망은 어떠하였겠는가. 그 산은 높고 눈이 쌓이고 호랑이 굴이 많이 있는 곳이었다. 그래도 상관없다. (이)벽은 스님들을 깨워 자기와 동행케 하였다. 그는 맹수의 습격을 막아 내기 위하여 쇠꼬창이가 달린 몽둥이를 짚고서 캄캄한 밤중에 길을 계속하여 희망하던 목적지에 도달하였다.

(이)벽과 그 일행의 도착은 산 속에 파묻힌 고적한 그 곳 사람들을 크게 놀라게 하였다. 무슨 까닭으로 이 아닌 밤중에 이처럼 많은 손님들이 찾아 들었는지 상상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미구에 모든 것이 밝혀져서, 두려움 뒤에 기쁨이 따랐으며, 그 기쁜 상봉으로 빚어진 심정을 얼마 동안 털어 놓느라고 미처 날이 새는 것도 몰랐다.(「한국천주교회사」상,300-301면)

결국 정약용 선생의 단순한 강학회 개최 기록에 대하여 다불뤼 주교는 그 내용을 아주 자세히 서술하였다. 다만 강학연돌를 1777년 丁酉년이라고 하였는데, 정약용 선생은 1779년 己亥년이라고 적고 있으며, 정학술은 1778년 무술년과 1779년 기해년으로 기록하고 있다. 특히 정약용 선생은, 1779년 강학 이후 7년(1785년)이 되던 해, 바로 이 강학을 비방하는 소리가 생기기 시작하여 다시는 그러한 강학을 할 수가 없었으니, 성대한 잔치는 두 번다시 하기 어렵다(昔在己亥冬講學于天眞菴走魚寺雪中李檗夜至張燭談經其後七年而謗生此所謂盛筵難再也)고 하였는데, 만일 이 강학이 당시 여기저기 흔하게 개최되던 儒敎의 강학이었다면 구태어 비방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므로, 천주교 강학이었음을 짐작케 하고 있다.

연도만 차이가 있을 뿐, 권철신, 정약전, 이승훈, 정약종, 정약용, 등 같은 인물들이 강학하는데 이벽이 설중에 산을 넘어 밤중에 도착하였다는 내용은 같으므로, 1777년에도, 1779년에도, 같은 이물들이 겨울 한 밤중에 눈쌓인 큰 산을 넘어온 이벽선생과 강학을 하였다고 보기보다는, 당시 저명한 학자 권철신이 참석하는 같은 강학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만일 동일한 인물들이 동일한 시기의 기후와 동일한 지리적인 여건과 상황에서 두 번의 다른 강학이었다면, 정유년 즉 1777년의 강학보다는 기해년 즉, 1779년의 강학이 더 발전된 천주교 강학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정약용이 말하는 기해년의 강학은 주어사에서가 아니고, 천진암에서 개최되었음을 다불뤼는 밝혀주고 있는 것이다. -변기영 신부-


Writer : 변기영   Date : 2012-04-04 2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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